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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예술

게르니카(Guernica, 1937)

트루비옹 2016. 12. 27. 15:57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렸다."

 

지루한 사만다 공식 블로그

 


 

출처 : http://www.davidwiesner.com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작품을 보아 왔지만 가슴으로 동감하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적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고, 역사적인 이야기들 또한 글로써 전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모두가 칭송하는 다빈치의 작품이나 고흐의 작품을 보고서도 그저 그렇다 혹은 아직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식의 반응 뿐이었다. 물론 내가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어쩌면 걸작이라 함은 모두가 처음 보고도 놀랍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첫째로 그 작품의 규모가 굉장했고, 둘째로 익살스럽게 표현된 그림에서 억압받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가슴 절절하게 아주 조금이나마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스페인 내전의 참상과 그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작가의 분노와 그 당시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거의 흑백톤으로 채색이 되었는데, 색이 과하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레이나 소피아 미술관[각주:1]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을 감상했는데, 고야[각주:2]의 작품이나 벨라스케즈[각주:3]의 작품도 물론 뛰어났지만 고풍스럽고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약간 기괴하고 특이한 스타일의 미술작품에 눈길이 갔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는 그의 작품에 관한 기념품을 구할 수 없어 그의 고향인 '말라가'에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라가에는 피카소 박물관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을 찾아 피카소가 살아온 환경이나 작품이 있기 전의 데생들을 보면서 작가의 고뇌 또한 볼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게르니카 책갈피와 게르니카 그림(액자에 끼울 수 있는)을 구할 수 있었다. 구입했던 그림은 크기가 상당해서 그림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써야 했다. 때문에 이동할 때마다 투덜거리며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렸다.

 

1940년 파리에서 독일 장교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 그림을 그렸나?"

그러자 피카소는

"아니, 내가 아니라 당신이 그렸다."

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피카소이지만 이러한 폭력 사태와 분노를 만들어 낸 것은 그들(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내전중이었다. 1936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스페인 인민전선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나치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사단을 파병하고 폭격 지원도 약속했다. 이윽고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난 나치 독일의 폭격기 24기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쏟아 부으며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게르니카는 아주 작고 소총이 1정 밖에 없을 정도로 군사적 전략지도 아니었지만 '무기 성능 테스트'라는 이유만으로 폭격을 당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본래적인 존재로부터 이탈한 인간의 문명과 참상을 폭로한 종교적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가 이 그림에 폭격기나 파괴된 마을을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애초부터 게르니카의 폭격 사건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 보다는 이를 통해 인간의 동물적인 공격성과 힘이 없는 약자들의 절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이전부터 얼굴은 황소에, 몸은 사람인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르스를 많이 그려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람을 먹고 사는 이 반인반수는 화가 자신으로 그리고 모델은 수세에 몰려 꼼짝 못하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의 왼쪽에 있는 황소 역시 광폭한 미노타우르스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은 무척 잔인하게 보여진다. 이것은 그 시대의 파시즘과 군부 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황소 턱 밑에서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은 그 황소에게 당하는 민중들을 의미한다. 그 밑에는 부러진 칼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는 죽은 청년이 있는데, 인간의 미래가 죽어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지만 칼을 쥔 청년의 손 위에는 한 송이의 갸냘픈 풀꽃이 피어 있다. 이것은 황소의 횡포와 이러한 청년의 죽음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하며 승리의 의지와 함께 인류의 희망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염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청년을 짓밟고 신음하는 군마가 보인다. 이는 죽음을 앞두고 몸부림치려는 파시스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오른쪽 납골당 속에서 울부짖는 어린이와 여인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여인은 등불을 움켜쥔 팔뚝을 밖으로 내밀고 있다. 이것은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그 현장에 하늘의 등불이 비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점과 연관시켜 보았을 때,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단순히 1937년 게르니카 폭격 사건을 그린 것이라기 보다, 폭력적인 야수성과 힘없는 이의 절규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의 파괴와 폭력, 피해자, 동물과 인간, 남자와 여자 등 이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힘 센 자의 폭력과 힘없는 자의 관계인 것이다. 역사적 현실을 소재로 인간의 실존상황과 희망을 그린 종교적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어두움이 공간을 채우고 흑백으로만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 인간의 실존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모든 형상은 형태적 변형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사물의 외형적인 이해 보다는 본질적인 심층 이해를 통한 표현 방식이며, 이것은 현대의 부조리와 불안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신기한 점은 싸우고, 쓰러지고 절규하는 극도의 표현 방식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우리를 흥분과 분노 상태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색과 구도 덕분일 것이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쏟아낸 수많은 습작들은 원색의 울분과 짐승의 포효를 표현하는 데 반해, 이 거대한 대작에서는 거의 흑백과 무채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그림을 보는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이와 더불어 중앙으로 향한 거대한 삼각형의 구도는 화면을 더욱 안정되게 한다. 이 그림에 담긴 분노와 절규는 절제를 찾고 커다란 역사의 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1. 프라도 박물관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다. [본문으로]
  2. 고야(1746~1828), 대표작으로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고야의 자화상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벨라스케스(1599~1660), 대표작으로 시녀들, 거울을 보는 비너스, 실 잣는 여인들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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