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역에서 하코다테로 향하는 길. 눈과 바다가 한 장면에 보이는 신기함이 오늘도 이어졌다. 날씨는 푸르다 못해 치명적이기까지 했다. 바닷가를 쭉 타고 이어지는 해안 철길이 여행의 노곤함을 그대로 씻어주었다. 여행의 딱 중간이 되는 날인데, 피곤함은 없고 아직도 설렘 한가득을 안고 가본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해안가를 끊임없이 어슬렁대는 파도들을 보며 수 시간을 달렸다. 하코다테는 홋카이도 남서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삿포로 공항에서 비행기로 쉽게 갈 수도 있고, 이렇게 우리처럼 바닷가를 달리는 낭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시가지가 바다에 튀어나온 열쇠형의 지형을 하고 있어서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전망이 참 멋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코다테 역에 도착. 여름의 복잡함과 가을의 적막함이 걷힌 이곳의 겨울은 삿포로보다 남쪽임에도 불구하고 더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도 그럴것이 삿포로처럼 그곳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니와 우리만 이방인처럼 느껴졌던 탓에 정말로 낯선곳을 찾았다는 느낌이 강해서였다.
하코다테는 10월 말이나 11월 초순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12월 중순경부터 3월 중순 정도까지는 거리의 노면에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굳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 역시 그랬고, 여행의 설렘 대신에 긴장감으로 한껏 무장을 해야 했다. 그냥 눈이 굳어버린 것이 아니고, 거의 빙판길이 되어 있어서 정말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미끌거리는 도보를 어렵게 이겨내어 고대하던 점심식사 장소인 '럭키삐에로'에 도착했다. 멀리까지 와서 해산물이나 스시가 아니고 도대체 왜 햄버거에 감자튀김이겠냐 싶지만 나름 하코다테 지역에서 꽤 유명한 체인이라고 해서 방문했다. 복고느낌의 매장(약간 다방 같은?)에서 햄버거를 팔고 있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우리같은 이방인들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햄버거 보다 맛이 있느냐'가 중요했다.
이여사가 메뉴를 주문하고 번호표를 받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번호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직원이 친절하게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럭키삐에로에서 가장 유명한 셋트인 차이니즈 치킨버거 셋트를 주문했다. 일본식 치킨 가라아게와 양상추, 그리고 마요네즈라는 다소 심플한 조합이지만, 다시 말하면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여기에 데미글라스 소스와 치즈토핑으로 마무리 한 감자튀김은 멀리서 오느라 고생한 이방인들의 뱃속을 따뜻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만족乃)
우리가 선택한 숙소는 도큐스테이 하코다테. 3성급의 심플한 숙소였다.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 리셉션의 직원이 극강의 친절모드로 우리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양껏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영어가 어느정도 되는 직원이 와서 아주 능숙한 대응을 해 주었다.
숙소 방으로 안내받은 우리는,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 숙소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심지어 세탁기랑 건조기 일체형 기기도 있었음 ㅋㅋ) 잠깐 쉬고 하코다테의 야경을 감상하러 가기로 했다. 한겨울이라 햇빛은 빨리 내려앉았고, 그 공간을 주황 불빛 가로등이 대신하고 있었다.
하코다테 시가지 남서부에 위치한 해발 334미터 높이의 하코다테 산 까지는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하코다테에서 이용할 수 있는 패스는 내일부터 사용할 예정이라 주지가이 역\을 지나 산로쿠역까지 그 먼 길을 걸어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의 경사도 장난이 아닌데, 눈이 녹지 않고 아주 단단하게 얼어버려서 가는 내내 정~말 고생을 했다.
케이블카가 위치한 산로쿠역에 도착해서 곧장 왕복 티켓팅을 하고 부랴부랴 상행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망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 즈음에는 밤은 깊어지고 조명은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케이블카 도착 후 몇 개의 계단을 지나 옥상처럼 보이는 루프탑에 올라오니 생각보다 강한 바람이 우릴 반겼다. 이곳까지 올라온 이상 너나할 것 없이 멋진 야경을 담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다. 멋진 사진을 위해선 일단 저 사람들을 뚫어내는 것이 우선, 그리고 큰 키와 긴 팔이 필요했다. (ㅎㅎ)
하코다테 야경과의 첫 상견례. 검은색 도화지에 잘 다듬어진 건물과 조명들이 수놓여 있었다. 하마터면 심심했을 뻔한 야경이 양쪽으로 만(Bay)처럼 움푹 패여있는 바닷가로 매끄럽게 디자인되어 있었고, 대동맥처럼 보이는 중심가의 힘찬 주황 조명들이 도시의 혈류(血流)처럼 보여, 마치 도시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동안 이 멋진 야경에 넋이 나가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우리가 온 증거를 남겨보기로 했다.
역시나 최고 난이도의 야경 인물 사진. 그래도 조명 없이 이 정도 사진을 남긴 것에 너무나 만족한 우리였다. 렌즈 안으로 쉬이 들어오지 않는 빛은 최대한의 노출로 대신 해야했고, 우유니사막 야간투어에서 들었던 'Don't move, 30seconds'가 생각났다. 사실 움직이지 않고 싶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어쩔수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했던 건 안 비밀ㅎㅎ.
야경 인물사진에서 흔히 사용되는 플래시모드를 드디어 사용해보기 시작했다. 이상할 줄 알았는데, 막상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필름카메라 느낌의 사진이 나온게 정말 만족?
최대한 조명빨(?)을 주기 위해 셀프로 플래시를 주는 나. 근데 왜 북극에서 펭귄 만나기 위해 변장한 사냥꾼 같이 나왔을까... ㅎㅎ 우리는 부모님께 전달할 안부메세지 영상도 찍고 차근차근 밑으로 다시 내려왔다. 하행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기념품샵에 잠깐 들렀는데, 오타루에서 사지 못했던 더블 프로마쥬 케잌을 뜬금없이 구매했다. 편의점에 들러 위스키와 토닉워터를 사서 하이볼을 만들어 마실 참이었는데, 안주로 더할나위 없어보였다.
다시 힘겹에 내려온 우리. 미리 찾아 둔 하코다테 맛집(스키야키를 먹을 수 있는 좀 괜찮은 맛집)으로 어렵게 찾아갔으나, 이미 영업이 끝났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접한 우리는 갈 길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시덴...(욕 아님)
한국이나 일본의 대도시(삿포로, 오사카, 도쿄 등)를 생각해서 그런지 저녁 9시쯤에는 그래도 음식점을 찾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우리는 거리를 한참 배회했다. 열려있는 음식점이면 그냥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고, Kuraya라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당시에 배가 너무 고프고 지쳐있어서 구글 평점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예약손님이냐고 물어보는 주인장 할머니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니 프라이빗한 공간을 안내해주셨다. 영어가 전혀 안되는 곳일거라고 감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미 자리를 안내받을 때부터 언어소통에 큰 장벽이 있을것이라 생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메뉴선정'이었다. 피곤함과 주린 배를 이겨내기 위해 밤늦게 음식점을 찾아들어온 우리는 뭐든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일본음식이 다양함에 기초한 수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싫어할 만 한, 예를들면 홍합이나 굴, 멍게 등의 음식들을 잘못 주문하는 상황까지 바라지 않았다. 고기 육(肉)과 물고기 어(魚)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서 고기냐 생선이냐를 한 번 고민하고(당연히 고기 ㅋ) 제일 비싼 게 가장 맛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냅다 소고기와 닭고기를 주문했다.
따끈한 숯이 타오르는 불판이 셋팅되었고 곧장 고기를 올리니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익어가는 우리의 식사. 소고기는 마블링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고기가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해 술안주로 딱 좋았고, 닭고기는 염지가 잘 되어 있어 닭갈비 소금구이(?)를 먹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오늘의 술. 의사소통의 장벽 안에서 이 술이 무엇이오 저 술이 무엇이오 물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고, Hot이냐 Cold냐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어서, 일단 우리는 따뜻한 사케를 마셔보기로 했다. 사실 싸구려 사케의 향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술을 데핀거라고 하는데, 추운곳에 내내 있다가 실내로 들어온 우리는 당장 따뜻한 술을 마셔보고 싶었다. 그리고 감자를 이용해 증류한 감자소주도 한 잔 시켰는데, 이 술은 도수가 대단해서 마시면 '우왁'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당시에 위스키에 한창 관심이 많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쓴맛이 아주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고기를 먹을 때 항상 밥을 곁들이는 편인데(부부의 취향이 똑같은 것), 마침 솥밥이 있어서 주문을 해봤다. 고체연료와 함께 투박한 나무 뚜껑이 얹힌 솥이 세팅되어 나왔는데, 불이 사라진 후 5분 정도를 기다리라고 했다. 이후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오픈하고 고슬하게 익어 반짝이는 윤기를 내는 밥을 그릇에 퍼 담으니 작은 공간 안에 엄청난 솥밥의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았는데, 세상에 밥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맛이 엄청나게 좋았다. 밥알 하나하나가 간이 잘 스며들어있고 찰기는 우리네의 것과 비슷해서 전혀 이질감도 없고 오히려 더 뛰어나다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웃기긴 하지만 둘 다 '하코다테에서 먹었던 그 솥밥은 정말 대단했어'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이곳에서 반드시 시켜야 하는 메뉴인 것은 확실하다. 정말 웬만하면 서로 맛있는 음식을 양보하고 배려하는 편인데, 솥밥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밥알 하나까지 다 챙겨먹었다)
도큐스테이 하코다테의 하이라이트는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루프탑 노천탕. 우리는 낮에 간 것은 아니라서 하코다테 항이 내려다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말 기똥찬 북해도의 하늘이 보였다. 노천탕이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조금이라도 온탕 바깥에 살을 들추면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공격해댔다. 생각해보니 꼭대기에 있는 온천을 해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정말 이색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저 중간에 있는 벽 너머로 이여사도 온천탕을 즐기고 있었다는 후문 ㅎㅎ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주류코너를 들러 겟한 선토리와 토닉워터. 마침 숙소의 중간층에 얼음자판기에서 무료로 얼음을 제공해주고 있었는데, 하이볼을 먹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전망대에서 구매했던 더블 프로마쥬와 함께 시작된 즐거운 만찬. 세상의 온갖 바람을 맞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뜨끈한 온천에 몸을 녹이고 마시는 술은 이 무슨 최고의 수면제인가. 우리는 오늘의 여담을 나눌 새도 없이 금세 잠에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