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임신 6개월)
이여사의 가까운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이 출산을 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아기침대를 포함해서 다양한 옷가지와 아기 용품들을 물려줄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부랴부랴 방문했다. 거의 수 백 만원어치라고 해도 될만큼 차에 한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큰 은혜를 입은 기분이었다. 주변인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축하해주고 선물해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이여사가 그동안 쌓아왔던 덕이 다양한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일날이면 집 앞 가득 쌓여있는 택배상자에 내 선물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일까 괜한 질투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하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공감해주는 나현이가 그렇게 사랑 받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결혼식 혼인서약 중 -
같이 SVP 지도선배를 했던 회사 동료들과 죽이 잘 맞았던 이여사는 종종 이렇게 모임을 결성해서 문화생활을 즐기곤 했다. 아크릴 플루이드로 곰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오크통에 술을 넣고 숙성해서 나만의 위스키를 만드는가하면(마시지는 못하지만), 나랑은 서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가서 휴일을 즐기기도 했다.
이여사는 임신 중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혜택도 잊지 않았다. 내 가족이 이런 혜택을 잘 누렸으니 나중에 혹시나 임산부를 마주하면 배려를 잊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2024년 10월 (임신 7개월)
입체초음파를 봤다. 똘똘이의 얼굴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초음파였다. 눈은 새초롬하게 감고 있었고, 코와 입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뭔가 우리 할아버지 얼굴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다. 태어난 이후에도 이 모습을 은근하게 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정도면 잘생긴거(?) 아닌가 싶었다. 태교여행 이후에 조금 피곤했는지 푹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똘똘이의 입체초음파를 접하고나서 누구와 좀 더 비슷할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근데 누구를 닮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를 좀 더 닮았을꺼야~ 하는 내 주장에 무게를 싣고 싶었는데, 엽기적인 사진만 생겨버렸다.
2024년 11월 (8개월)
베이비 페이스라는 서비스가 예비 엄마아빠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아기의 첫 사진 격이 되는 입체 초음파 사진을 베이스로 태어난 이후의 사진을 예상해서 프린팅 해주는 서비스인데, 생각보다 비싸서 내 돈주고 사기에는 아까운 육아템(?) 이었다. (35,000원 정도?) 마침 해외봉사를 같이 다녀왔던 J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신청해봤다.
막상 받아봤는데 생각보다 예쁜 모습으로 나와서 너무 미화시킨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부모 마음은 내자식이 예쁜건 마냥 좋은가보다. 이여사의 회사 선배가 선물해 준 기저귀 갈이대 위에 사진을 놓고 실제 있다고 생각하고 기저귀 가는 연습도 해봤다. 부모님께도 사진과 영상을 전달해드렸더니 애가 어쩜 저리 이목구비 뚜렷하고 예쁘냐며... 하루종일 저 사진만 보신다고 하셨다.
이후에도 나와 이여사가 선물받은 물건들은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정말 이렇게 계속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받았고, 이러다가는 어떤 선물을 누구에게 받았는지도 잊어버릴 것 같아 엑셀로 정리를 해 둘 정도였다. 출산 전에는 이런 아기 용품들이 정말 한 번 이상 쓰기나 할까 싶었지만, 필요없는 물건들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정말 이렇게 커져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커지고 있는 이여사의 배는, 임신을 처음 마주한 우리를 설레게 하기도 했고, 두렵게 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튼살크림과 오일을 발라가며 튼살의 습격을 열심히 방어하고 있는데, 곧 함락될 것만 같았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시고 나서 배에 튼살이 정말 많이 생기셨는데, 어렸을 때에는 특별히 별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근데 막상 내 배우자가 임신 때문에 배에 없어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다고 하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내가 뱃살이라면 더 자신이 있는데 남자가 대신 아이를 품어줄 수는 없는걸까.
11월 중순에는 모든 세상이 가을을 노래하는 것처럼 하늘은 높고 땅은 수많은 색깔로 채워져 있었다. 근데 고작 보름 후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게되었다. 11월 가장 마지막날에 첫눈이 왔다. 아니, 쏟아졌다. 가로등이 모자를 쓰고 나무들이 눈 무게에 못이겨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작년 1월에 갔었던 홋카이도 지방의 겨울이 생각날 정도였는데, 이런 첫눈이 반갑지 않았다. 아직 휴직하기 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그래도 휴직 전까지는 출근이 편했으면 했다. 자칫 길이 미끄러워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니까. 이후의 날씨가 생각보다 따뜻해서 걱정하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첫눈이 이렇게 예뻐보이지 않긴 처음이었다.
2024년 12월 (9개월)
출산 전 마지막 미사. 그리고 오늘은 성탄 미사 반주였다. 오르간 반주를 할 때 만큼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고 멋진 이여사. 똘똘이에게 정말 이정도로 좋은 태교가 있을까 싶다.
다음날 올해 마지막 초음파를 보러 갔다. 똘똘이는 쑥쑥 크고 있고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찰랑거리고 있었다. 시골의 또랑가에서 물살에 살랑거리는 수초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것 같다.
평생 당뇨걱정은 안하고 살 것 같던 이여사도 임당(임신성 당뇨)의 늪은 피해갈 수 없었다. 단 음식과는 별개로 호르몬의 영향에 의해 혈당이 튀는 걸 임신성 당뇨라고 하는데, 첫번째 검사에서는 괜찮다가 두번째 검사에서 임신성 당뇨 주의 판정을 받았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수치가 계속되면 아이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자랄수도 있다고 해서 무조건 관리가 필요했다. 동탄 제일병원 1층에는 내분비계 진료도 받을 수 있어서 영상 교육도 받고, 약국에서 셀프 체크 키트를 구매해서 매 끼니마다 확인을 해 주어야 했다. 아이를 위해서 잘 먹어야 하다가도 너무 잘 먹으면 안된다는... 아주 아이러니한 임신의 세계... 난 남자라서 아마 경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것 또한 참 고역일 것 같았다.
회사 동기들과 사진도 찍었다. 내년이면 뿔뿔이 흩어져서 뭔가 건설적인 것들을 할 예정인 자랑스러운 17-18 동기들. 나를 포함한 남자 두 명은 이런 스튜디오 촬영이 처음이라 어떻게 어떤 포즈로 있어야 할 지 한참을 어색해 했지만 사진은 어차피 1천장 찍고 1장 건지는 거니까.
조리원 소개/연계로 촬영하게 된 만삭사진. 출산까지 거의 한 달 반 정도 남은 시점에서 찍었는데 나름 행복한 예비 가족의 모습이 잘 담긴 것 같다. 이여사는 임신 중에 예쁘게 다닐 일이 없다가 이렇게 각잡고 사진을 찍으니 기분이 더 좋았다고 했다.
집 앞 '공원블루스'라는 곳에서 만찬을 즐겼다. 뇨끼와 대구살 스테이크, 그리고 나폴리탄 파스타를 시켰고, 나는 여기에 와인을 한 잔 곁들였다. 혹자가 말하길 아이가 없을때 몸이 무거워도 둘 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는데,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매일매일 외식을 하고 데이트를 즐길껄~ 하며 가끔은 후회를 한다.
올해 마지막 날을 함께한 이여사와 나, 그리고 똘똘이. 이제 3주만 더 있으면 세상을 마주하게 될텐데, 벌써부터 나오고 싶은 모양이다. 예전에 16주 즈음이었나, 뱃속에서 뽀글거리는 태동이 느껴졌다고 말한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낮밤 할꺼 없이 쿵쾅대기 일쑤라고 했다. 가끔 손을 대고 있으면 주먹질을 하면서 인사를 하는데(어느나라 인사 방식이지?) 인사성이 바른거겠지? 실없는 상상도 해본다.
똘똘아 새해 복 많이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