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뛰쳐나오기
PEACH항공이 싸다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수식어가 걸맞게 굳이 여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여지껏 비싼돈을 들여서 유럽이며 뉴질랜드며 동남아며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 여행을 결심한 건, 단순히 내가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PEACH항공에서 제공하는 프로모션 항공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직은 학생이라는 수식어 답게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무작정 뛰쳐나왔다. 두 달간의 인턴이 끝나는 바로 다음 날, 옷가지 몇개만 챙겨서 출발했다. 계획? 당연히 없었다. 가서 세우지 뭐!
드디어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 내가 이용한 피치 항공은 간사이 지역만 운행하는 일본의 저가항공인데, 자리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역시나 일본!'이라는 소리가 나올만큼 서비스도 좋고 도착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내가 도착한 날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주변이 한산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오사카 시내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어디가야 시내로 나가는 지하철을 탈 수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어디있지?
찾았다! 나가서 무작정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빠꾸도 먹고 하다보니 발권기계를 발견했다. 920엔(한화 약 8500~9500원)이나 하는 티켓을 끊고 전동차 한켠에 앉았다. 덜컹거리는 소리는 어딜가나 똑같지만 마음은 좀 다르다.
어느 누구나 초행길은 서투르다. 나 또한 그랬다. 공항에서 바로 난바로 오는 전동차를 탔지만 중간에 엉뚱한 곳에 내려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일본의 지하철 노선은 서울의 노선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처음 마주한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위 사진은 미도스지(Midosuji)라인. 온통 한자(칸지)인데, 난 아무것도 모른다구...
신세카이 부근의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내 방은 7층에 위치했는데, 마침 도로변과 츠텐카쿠가 훤히 보이는 창가였다. 푹푹 찌는 날씨 덕분인지 숙소에 오자마자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오사카의 밤풍경을 바라보는 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마실 맥주의 맛을 한껏 높이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리라 다짐했다. 오늘 종류별로 맥주를 사서 밤에 마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우메다 역 카페에서 유카를 만났다. 뉴질랜드 이후로 1년만에 만난 유카는 변함이 없다. 유카는 나를 알아봤고, 나도 유카를 단번에 알아봤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같은 기분이 아니고, 수십년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설레고 가슴이 벅찼다. 유카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오사카 여행 계획을 같이 세워보자 말했다. 내가 점심을 안먹었다 말하니, 뭐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 나는 유카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 패스를 끊은 후 도톤보리로 향했다. 도톤보리에는 시뻘건 대게 한 마리가 꿈틀대며 나를 반겼다. 게살 발라 먹으면 수십 인분은 나오겠다.
성인 남자 30명 정도는 먹어치울 것 같이 생긴 복어도 있다. 개성있는 간판 덕에 눈을 가만히 둘 틈이 없다. 위로는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그리고 아래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나도 점심을 거른탓인지 코를 킁킁댄다.
도톤보리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마치 주말의 명동 한복판을 걷는것처럼 사람은 벌떼처럼 많았다. 점심을 잊은 탓인지 타코야끼 굽는 냄새에 절로 눈이 갔다. 주인장은 저 송곳같이 생긴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타코야끼를 뒤집었다. 하나 시켜먹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타코야끼는 독약이다. 너무 뜨거워서 유카 앞에서 체면 못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너~~무 뜨겁다).
구리코 안녕? 도톤보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운하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구리코. 오사카에 다녀온 사람들은 죄다 이 아저씨와 사진을 찍길래 무엇때문에 유명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글리코겐에서 따온 일본식 발음으로, 저 런닝맨을 그린 과자를 출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했다고 한다. 과자(빼빼로 등)뿐만 아니라 식품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고. 이곳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구리코와 사진을 찍기 바쁘다.
한 성깔 하게 생긴 아저씨 이름은 '쿠시카츠 다루마'다. 쿠시카츠는 꼬치튀김이라는 뜻인데, 가이드북에도 나와있었고 유카도 일본에 왔으면 한번 쯤 먹어보라고 권하던 집이다. 유카는 오사카에 왔으면 구리코 말고도 이 남자와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나에게 사진을 강요했다. 한 성질 할 것 같은 아저씨의 인상 때문에 조금 망설여 졌지만 나중에 꼭 와서 먹어볼 생각이기에 사진 한 장 남겼다. 어쩌면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중에 제일 잘 나온 사진이기도... (ㅠㅠ)
어학연수 때문에 내일 뉴질랜드로 떠나는 유카는 우메다 스카이 빌딩을 마지막으로 헤어져야 했다. 먼 곳을 바라보며 수많은 소리가 흩어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옛 이야기들을 했다. 와인농장에서 와인을 시음했던 것, 양봉장에서 꿀도 맛보고, 찬바람 부는 겨울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이름을 새긴 일 등등. 뉴질랜드에 와서,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외국인 친구인 유카는 나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다. 하루가 길지 못한게 아쉬웠다.
저녁노을이 나를 잡아 끄는 것 같아 고단했다. 하얗게 빛나던 태양빛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늘 나를 곤두서게 하던 비행기의 울음조차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오사카의 습한 더위와 시끄러운 경적소리에 적응한 것이 분명하다.
하루의 마지막에 들이치는 햇빛은 언제나 멋지다. 혼자하는 여행에서는 고된 하루를 보상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못내 아쉬웠지만 숙소로 돌아와 두어시간 정도 잠을 잤다. 해는 저물고 있었지만, 온종일 걷고 땀을 흘린 탓에 지쳤나보다.
한 30분 잤으려나? 7층의 내 방 창문을 여니 바로 저녁놀이 보였다. 내가 나올때 즈음엔 붉은색과 푸른색의 경계가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유카가 라멘집을 추천해줬는데 그곳에 가볼 참이다. 밤이되니 습하지 않고 선선하다.
온종일 걸었더니 배가 출출하다. 도톤보리로 향하던 중 오사카의 명물이라는 551호라이 니꾸망. 내가 사먹었던 곳이 오사카 난바 본점이었는데, 니꾸망(고기만두)이 굉장히 맛있다고 소문나 있었다. 당시 내가 갔을 때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요기를 할 참으로 두개(320엔)를 시켰다. 겉은 촉촉하고 안은 뜨뜻미지근 한 고기로 속이 꽉 차 있었다. 빵 생지가 텁텁함 하나 없이 촉촉하고 속에 꽉 차있는 양파와 고기의 조합은 먹는 내내 나를 흥분하게 했다. 괜히 간식으로 먹으려다가 하마터면 큰돈쓰고 왕창 사먹을 뻔 했다. 하나를 그 앞에서 게 눈감추듯이 해치우고 하나는 아껴먹을 참에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도톤보리는 어둠을 이기기 위해 전광판의 불빛으로 가득찼다. 도톤보리는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한글로 된 설명도 나온다. 온통 알 수 없는 글자 투성이지만 모르는 내용들이라 신난다. 유카가 말해준 라멘집이 어디있었더라.
다리 옆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순서가 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이날은 달이 참 밝았다.
유카가 추천해 준 이치란라멘(ICHIRAN)집 드디어 도착. 일본의 주문 시스템은 언제봐도 흥미롭다.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아 마시는 기분이다. 미리 선택지에 라면의 유형을 취향에 맞게 적어 낸 나는 맥주를 추가해서 시켰다. 일본에서의 맥주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함이다. 김유신의 말처럼. 아니, 말은 칼로 베었다지만 이 맥주의 유혹은 어떻게 견딘담?
직원에게 1人이라고 말하니 자리 안내를 해준다. 양 옆으로는 칸이 쳐져 있고, 앞에는 발이 내려져 있다. 한 5분을 더 기다리니 나를 기쁘게 해 줄 맥주와 함께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라멘이 나온다. 뭐, 한국 맥주 빼고 다 좋아하는 나는 맥주가 주는 기쁜 목넘김에 감동하여 다 들리도록 '캬~'를 연발했다. 꼴딱꼴딱 아주 잘 넘어간다. 라멘은 기름기가 조금 있고 담박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면은 매워야해.
오사카 첫날은 이렇게 저문다. 아마 정신못차리고 맥주를 세 개나 더 사서 들어갔다지. 밤에보는 운하의 전등불이 정말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