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난 아직도 캐리어를 들고 여행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사실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나이이긴 한데, 백팩보다 훨씬 편함에도 불구하고 백팩을 선호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백팩을 메고 끙끙거리며 여행하던 시절을 추억하는 나이가 되어버린건지, 아니면 두 팔과 다리가 자유로운 여행을 선호하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짐을 적게 가져가는 걸 좋아해서 그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백팩여행 하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내 주변의 사람에게도 (피해자: 내 아내...) 백팩을 메고 가는 것을 권유(강요 아님!!)하고 있다. 근데 특이하게 백팩이 주는 뭔가 오묘한 매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조금 더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도 있고... 아무튼 우리는 백팩과 캐리어를 모두 가져가기로 했고, 이 선물같은 시간을 남김없이!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준비도 많이 했으니까!!
우리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장인장모님 댁에서 반나절 정도를 묵은 뒤, 출발하기 2시간 전 쯤인 12시 즈음 공항에 도착해 탑승 수속을 밟았다. 인천공항에 어울리지 않는 한적함을 마주하고 나니 여행을 간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고, 너무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얼떨떨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면세점 구경도 하며 여행의 분위기를 내고 싶었는데, 늦은 밤이라 진즉에 문을 닫은 이후였다.
우리의 일정은 파리의 샤를 드 골(CDG) 공항을 5시간 경유하고 포르투(OPO)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피곤함을 무릅쓰고 현지 시간으로 낮 시간대에 도착해서 하루 일정을 소화하려는 계획이었기에 11시간이나 되는 비행시간을 잘 이용하여 충분한 휴식과 잠을 청해야 했다. 환승은 뭐가 되었던 번거롭고 힘들다. 10년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 슬슬 환승 한 번 한 번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ㅋㅋ
이륙하고 한 대여섯시간은 소등상태에 있어 잠을 잘 청했고, 기내식과 함께 시작된 맥주와 와인. 신혼여행 요이땅!을 시작으로 해제된 금주령 덕분에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뭐부터 마실까 실컷 고민할 수 있었고, 두 달 만에 꿀맛같은 와인과 맥주를 즐길 수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술이 금방 오르기 시작했고,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잤던 것 같다.
어찌어찌 도착한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 도착 당시에는 이른 아침이었고, 다음 비행기 탑승까지 5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에 점심을 어찌어찌 해결해야 했기에 면세점을 지나 환승게이트 중앙쪽에 위치한 푸드코트 쪽으로 건너갔다.
우리가 탑승할 게이트의 번호를 확인해두고, 내려간 푸드코트. 신혼여행이라는 타이틀에 취한 것인지, 파리의 분위기에 취한건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스타벅스도 보였는데, 괜히 들어가기가 싫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나보다.
하몽이랑 치즈 대충 끼워넣은 바게트를 시작으로 신혼여행의 파티는 시작되었고, 이제서야 여행이라는 것을 실감한 우리는 와인을 시켜서 분위기를 만끽했다. 당시에 우리는 넷플릭스로 '시그널'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 날도 예외는 없었다. 조진웅과 김혜수의 탄탄한 연기력에 몰입하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우리가 왜 파리에서 택시를 타고 있는지를 설명을 하려니, 아직도 눈 앞이 아찔하다. 탑승게이트 바로 앞에서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던 우리는 이어폰을 꼽고 시그널을 보고 있었다. 뭐 적당한 시간이 되면 탑승 안내방송을 해주겠거니, 승무원들이 안내를 해주겠거니 싶었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너무 오랜시간동안 지연됨을 알아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나는 승무원에게 포르투 행 비행기는 언제 출발하냐고 물었더니 유럽사람들의 특유의 양손을 이용한 이모션을 보여주며 "너네 비행기 이미 떠났지~"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나니 술이 확 깨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게이트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와 씨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포르투에 도착은 하고보자는 생각에 오늘 바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두 가지 옵션을 찾아냈다. 하나는 파리에 하루 묵고 다음 날 출발할지, 다른 하나는 3시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것인지...
아마 저러고 있는걸 보면 오늘 바로 출발하는 옵션을 선택했던 거겠지... 계획에 없던 일정을 소화하는 것보다, 그래도 예약해 둔 포르투 숙소에 가서 하루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자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우리가 차를 타고 이동했던 것도, 샤를 드 골 공항이 아닌 오를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편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택시를 잡아서 이동을 했던 것이었다. 한 번의 실수로 40만원(택시비 10만원 / 비행기 30만원)이 되는 돈을 공중에 분해해 버렸다... ㅋㅋㅋㅋ 아마 택시타고 제 시간에 오를리 공항에 도착 못했으면 허공에 샤우팅을 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 잡고 우리가 제 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을 때, 비로소 웃음이 났다. 포르투 행 비행기에 오를 때 즈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국을 떠나 3년 만에 처음 들이키는 바깥공기였다. 우리는 용기만큼은 잃지 않았어!
재산을 잃었다면 조금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었다면 조금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었다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 괴테
우리의 고난은 비행기만 타면 끝날 줄 알았다. 포르투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그리고 도착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기내수화물을 찾으러 컨베이어 벨트로 향했다.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의 짐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안좋은 낌새를 느낀 우리는 Baggage Claim Center를 찾았고, 우리의 사정을 이러쿵저러쿵 설명해주었다.
"우리의 짐이 나오지 않았어. 우리 사실 비행기를 놓쳤는데, 다른 비행기를 타고 왔어"
"응 너네 짐 파리에 있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도무지 침착함이 유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분실신고를 위해 분실 프로세스를 진행했고, 우리의 짐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색깔인지에 대해서 알려줬는데, 대뜸 우리의 귀국이 언제인지를 물었다.
"너네 혹시 귀국은 언제해? 가장 마지막 일정이 어디야? 출국은 어디서해?
"우리 10월쯤에 바르셀로나에서 출국하는데, 왜?
"너네 그때까지 못 받을수도 있어. 참고해. 한국 주소도 알려줘"
"ㅋㅋㅋㅋㅋ"
이 말을 듣고나니 거의 정신이 나간사람 처럼 웃음이 나왔다. 안 풀리려니까 이런식으로 안풀리기도 하는구나를 체험하게 된 날이었고,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마신 와인이 이런식의 나비효과를 보여준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일 포르투에서 예약한 스냅일정을 위해서는 우리가 미리 준비해 온 옷을 입어야 했는데, 짐을 찾지 못한다면 그냥 망하는거였다. 그래도 우리 짐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여기서 한숨 푹푹쉬고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판단이 서서 결국 공항을 나와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저녁 9시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밤이 아름다운 도시답게 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들이 있겠거니 싶어서 밖을 나섰다. 밤이 되니 날씨가 살짝 쌀쌀했고, 밤공기는 무거웠다. 마치 우리의 무거운 마음 같았다.
식당이 위치해 있는 도우 강 주변으로 가려면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곳을 몇 블럭 지나야 했다. 초행길이라 길을 찾는데 한참 걸릴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조명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으니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곳이 금방 나타났다.
히베이라 광장에 가면 광장의 상징인 스퀘어 모양의 분수와 강을 끼고 쭉 들어서 있는 식당과 펍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늦게까지 배쫄쫄해가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포르투에서의 첫 끼는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 구글 평점을 보며 엄청 신중하게 찾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이름이 히베이라 스퀘어 였다 ㅋㅋ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광화문 광장에 있는 '광화문 광장' 식당 ㅋㅋ 별점도 4.6이었고, 우리가 들어가려고 했을 때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더 가고 싶어졌다.
정신없었던 하루를 보내고 나니, 우리가 목적지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으로 가득차서 몸이 축 늘어졌다. 기다리는 동안에 잠이 들 뻔 했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생맥주부터 시켰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과 피로를 한꺼번에 해소해 줄 거라 믿었다. 빈 속에 마시면 안 좋은건 알지만 콸콸 들이부었다. 안 좋은일은 하나도 생각 안나고 기분이 정말 정말 좋았다. 우리는 오늘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웃는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일류로 칭송했다.
그래도 포르투에 왔으니 포르투 음식 먹어봐야지~ 하며 시켰던 뽈뽀(문어다리 요리)와 해물밥. 문어 다리로 만든 요리는 생전 처음먹어 봤는데, 아주 훌륭한 식감에 놀라고 입안을 가득 채워주던 풍미에 두 번 놀랐다. 우리에겐 다소 간이 센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같이 페어링했던 포트와인이 짠 맛을 잘 잡아주었다. 그야말로 단짠단짠 폭행.
그 다음으로 맛보았던 해물밥은 뭐 이렇게 맛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훌륭했다. 애초에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이 우리 입맛에 딱 맞게 요리가 되서 나왔고, 해물밥이라는 이름답게 입 안에서 넉넉하게 퍼지는 향도 즐기기 좋았다. 아주 배부르고 즐겁게 먹은게 1년이 지나고나서야 쓰는 이 순간에도 기억이 난다. 포르투에서 먹었던 첫 끼니이니까!
우리가 빈속에 술을 콸콸 들이부었어서 그런지 술기운이 일찍 올라왔다. 포트와인은 다 마시지 못하고 숙소로 가지고 들어왔다. 저 포트와인은 여행 내내 마셨다. ㅋㅋㅋㅋ
하루종일 고생하고, 피곤하고, 술 기운은 잔뜩 올라와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지만, 우리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루가 힘들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힘들어도 웃고, 결국엔 여기까지 왔다... ㅎㅎ
뭐든 당연하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생각났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당연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포르투에서의 첫 날 하루를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