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텀이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겠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이제 막 3개월이 지났는데, 여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홋카이도 지방 여행을 계획했다. 이여사는 신행에서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행을 가느냐고 잠시 머뭇했으나, 삿포로는 이게 있고~ 오타루는 저게 예쁘고~ 하코다테는 저게 있고~ 비에이랑 후라노는 진짜 예쁠거야 라는 나의 착한 속삭임(?) 때문에 못이기는 척 비행기 예약에 동의했다.(동의를 당했다라는 표현이 맞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약 일주일을 계획해서 다녀온 홋카이도 지방의 여행은 매우 훌륭했다. 여행의 완성은 멋진 장소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훌륭한 숙소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이 가는 사람도 정말 중요하구나 라고 더더욱 느꼈던 여행이었다. 나고야에서도, 그리고 신혼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여행이었다.
홋카이도 일정은 꽤 빡빡하게 계획했다. 오타루를 포함한 삿포로 3박 일정, 그리고 하코다테로 건너가서 2박을 소화하고, 그리고 노보리베츠에서 1박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삿포로에 복귀해서 1박을 소화하는 일정이었다. 홋카이도 지방을 한 바퀴 쭉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다소 이동이 많아 렌트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운전 방향도 반대에 길눈도 어둡고 눈 오는 길을 운전한다는 건 지뢰밭을 운전하는 심정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거의 렌트 증후군이다 싶을 정도로 렌트만 했다하면 뭔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기다림과 설레임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
인천에서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으로 향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이라는 수식어와는 다르게 일본 치곤 꽤 먼 거리라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1월은 한국도 추운데, 위도가 훨씬 높은 홋카이도 지방은 얼마나 추울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런 걱정 때문에 따뜻한 옷을 많이 챙겨갔고, 캐리어는 빵빵해져서 이동이 느려질 정도였다. 그래도 나름 겨울 해외여행(나고야) 경험이 있었던 우리였지만, 일명 '겨울왕국'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어떠할 지 기대 반 걱정 반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코카콜라 주주라고 반가워하는 나. 사실 제로는 펩시콜라 마시고 있음 ...
점심 느즈막이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은 일식으로 주린 배를 채워보자고 했다. 공항 3층에 홋카이도 라멘집만 모아놓은 홋카이도 라멘도조로 들어가면 수많은 라멘집이 즐비하게 있다. 우리는 이중에서 새우로 국물을 낸 에비소바 이치겐을 선택했다. 사실 우리는 새우탕(컵라면)같이 좀 착착 감기고 개운한 느낌의 국물을 좀 기대했는데, 너무 짜서 깜짝놀랐다. 홋카이도의 음식은 다 맛있다고 누가 그랬는데... 처음 시작에 갑자기 물음표가 새겨졌던 식사...(맥주가 없으면 식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짰음)
공항에 가면 꼭 먹어보라는 대학교 동기들의 추천을 받아 찾은 아이스크림 집. 홋카이도는 유제품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보라고 했다. 근데 일단 맛은 둘째치고 양부터 합격. 딱 한국인이 좋아할만한 사이즈로 대령된 맛도리 아이스크림. 꾸덕한 식감과 쫀쫀한 맛이 주는 담백함은 말할것도 없다. 430엔. 아까의 짠맛을 싹 벗겨내기 좋은 담백꾸덕한 아이스크림이었다.
공항에서 삿포로 시내까지는 멀지 않았다. 역시나 교통이 잘되어 있는 나라답게 공항에서 시내로 곧장 출발하는 고속철을 탑승했고, 얼마 안걸려 도착했다. 언제쯤 가득 쌓여있는 눈을 보려나~ 하는 기대감의 게이지가 한풀 꺾여갈 때 쯤, 지하철 역으로 나와 마주한 이곳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하얀 세상에 잠시 적응하지 못하고 숙소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대다가 무사히 체크인까지 완료!
체크인을 마친 우리가 안내받은 방은 역시나 일본스럽게 작디작고 소중한 방이었다. 아무래도 긴 신혼여행으로 인해 통장에 자주포 직격탄을 맞은 탓에 호화st.의 숙소보다는 가성비 위주의 숙소를 선택했고,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역도 코앞에 위치해 있었고, 삿포로 중심 상가로 일컬어지는 스스키노와도 도보로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사실 겨울 삿포로에서 '도보로 n분 걸리는 거리'는 꽤 많은 힘듦을 내포하고 있다. 추위와 더불어 많은 눈이 오는 날이면 눈보라와 바닥에 잔뜩 쌓여 미끄러운 눈발을 헤치고 걸어가야 하는 고됨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소를 예약할 당시에도 '에게~ 이거밖에 안걸리네?'했던 거리가 실전에서는 굉장히 먼 거리로 느껴지곤 했다.
체크인 후 곧장 밖을 나선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계절이 존재하고 겨울에는 똑같이 눈도 내리는 것은 다르지 않았으나, 그 정도는 너무나 달랐다. 스스키노 쪽을 향해 얼마간 걸어가면서 도로변 가장자리로 제설되어 있는 눈은 가드레일을 거뜬히 넘어가는 작은 산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마저도 계속 내리고 있는 눈 때문에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제설차가 5분 칼대기를 하고 있어서 도로가 빙판길로 변할 우려는 거의 없었다.
한창 흩날리는 눈을 피해 들어간 다누키코지 상점가. 예전에 오사카나 나고야에서도 이런 형태의 상점가 형태를 본 적이 있는데, 비나 눈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이따금씩 마주한 상점가 중간중간의 횡단보도들. 이곳은 바깥으로 노출된 장소라 눈발이 흩날리면 그대로 들이치는 곳이기도 하다. 가끔 바깥공기를 마주하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오늘의 첫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마트구경 정도만 하다가 곧장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장모님이 챙겨주신 목도리 야무지게 차고 다닐 예정 ㅎㅎ근데 일본에도 세이프 도어가 있다니? ㅎㅎ
우리의 첫 일정은 삿포로 근교에 위치한 '삿포로 맥주박물관'. 삿포로 맥주는 홋카이도 지방을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맥주 중에 하나인데, 노란색 ★ 모양의 로고로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맥주이다. 박물관에 도착할 무렵에는 해는 저편으로 넘어가고 하나둘씩 조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건물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했더니 한국의 목욕탕과 그 외형이 참 닮았다..콜롬비아 패딩(내돈내산) 모델을 자처하는 이여사의 모델핏과 함께.
박물관 투어를 예약한 시간에 잘 맞추어 들어간 우리는, 곧장 가이드의 안내를 받았다. 가이드 한 명에 이름모를 사람들과 그루핑을 해서 안내를 받는 형식이었다.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삿포로 맥주의 기원은~ 역사는~ 그리고 맛의 특징은~ 수상 이력은~ 으로 온갖 칭찬과 유구함을 자랑하는 멘트들이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이정도는 일반적인 가이드 투어의 애교 정도라고 생각하고 흥미롭게 들었던 것 같다.
맥주 양조소가 민영화되면서 삿포로 맥주가 탄생했다고 한다. 오사카에서는 오사카 맥주(현재 아사히 맥주), 도쿄에서는 일본 맥주(현재 에비스 맥주)가 생겨났다고... 1958년부터 삿포로 맥주는 홋카이도 지역에서만 판매하는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삿포로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판매되는 맥주가 그 관성을 지속해오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삿포로 클래식은 '삿포로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맥주'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곳에서의 음주생활에 철저하게 반영해야 했다.
간단한 투어를 마친 우리는 맥주를 시음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투어의 꽃이자, 우리가 아마도 이 순간을 위해 투어를 예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시음을 위한 맥주들이 각 테이블마다 준비가 되었고, 아주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와사비 과자도 세팅이 되었다. 시음하기에 앞서 시작된 가이드의 '맥주 맛있게 따르는 법'에 대한 짧은 강의가 있었다. 먼저 전용 잔을 준비하고(중요함), 전용 잔을 45도 정도 60%정도 따른 후 기울여 맥주:거품이 1:1이 될 수 있도록 따라낸 후 거품이 잦아들면 나머지를 채워낸다! 라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사실 우리네의 맥주 마시는 방법은 간단했다.
였는데, 맛있는 맥주를 위해서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배운 하루였다. 친절하게도 한글로 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는 이 곳...
물론 우리에게 서빙된 맥주들은 시음을 할 수 있게끔 내어진 나마비루(생맥주) 형태였고, 머릿속은 온통 그것들을 어떤 효율적인 방법으로 입에 털어넣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사실 어떤 것이 블랙라벨이고, 프리미엄이고, 클래식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의 피곤을 말끔히 덜어낼 맥주가 내 몸안에 녹아들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
빨간 벽돌 위 자그마한 창문밖으로 바깥을 얕게 비추고 있는 조명아래 소복이 내리고 있는 눈이 보였다. 이 추운 날씨를 차갑고 알싸한 맥주로 이겨내보자 하는 것이 좀 아이러니 했지만, 신기하게도 이곳에서의 맥주가 정말 더 맛있을 건 또 뭐람. 정말 끝내주네 맛있네를 연발하며 조금만 더 마셔볼까 하는 우리의 다짐은, 맥주를 내어주는 곳으로부터 2층 계단 끝까지 늘어서 있는 대기줄을 보고 사그라들었다. 일단 첫 일정부터 과음을 했다가는 다음번 일정에도 지장이 있을까 걱정한 우리는 (사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이겨내기 위한 핑계임) 밖을 나서 어둑해진 하늘을 마주했다.
맥주 효모를 발효시키는 통들이 멸치 말리는 것처럼 엮여있었는데, 잠시 멈추어 사진을 찍었다. 왠지 독립투사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ㅎㅎ
지하철을 타고 금새 스스키노 중심상가 쪽으로 이동한 우리는 삿포로에 오면 꼭 한 번 쯤 먹어봐야 한다는 징기스칸을 마주했다. 일본의 유명한 식당은 한국의 잘나가는 식당들과는 다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홀이 그다지 넓지가 않다. 그래서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꾸겨지듯이 들어가서 아웅이 다웅이 하면서 먹어야 하는데, 그 덕분에 웨이팅하는 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회전율이 높으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지? 라고 아무 생각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한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는 후문 ... 추위와 한 시간 정도를 싸우다가 겨우 들어간 이 곳. 호명되는 우리의 순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 환기는 잘 될 것 같지 않은 이곳에서 당장 옷에 냄새 밸 걱정부터 해야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기본 상차림 세팅 비용으로 인당 300엔씩 받는건 조금 띠용(?) 했지만 일단 기본찬으로 김치를 주는 것 때문에 합격. 예전같으면 한국인들이 그만큼 많이 찾는다는 것으로 이해를 했겠지만, 이제는 일본사람들이 김치도 먹기 시작했나? 라는 생각도 갑자기 들었다. 삼성의 '삼'자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에서 참이슬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김치는 안될까 싶어서였다... ㅋㅋ
우리는 양갈비를 주문했고, 고기에 얹어먹을 공기밥도 주문했다. 고기의 모양이나 색깔은 다를게 없었다. 다만 고기가 염지가 잘 된 것인지, 아니면 추운 바깥에서 한 시간 동안 기다렸던 버프때문인지 이상하게 고기가 맛있는건 왜인지? 고기로 배부른 공간에 맛깔나는 나마비루가 주는 틈새의 즐거움은 덤. 오늘 이동이 많아 고생스러운 하루가 한꺼번에 보상되는 느낌이었다.
집에 가는 길. 스스키노 한복판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니카 상. 위스키와 보리를 들고 있는 스태인글래스 할아버지 그림인데,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업체인 니카(NIKKA)를 상징하는 광고판이다. 그 모양새가 독특하고 개성있어서 스스키노 거리의 랜드마크로 자리해 버린 케이스라고 해야 하겠다. 사실 광고판 바로 앞보다는 건너편에서 널찍이 보이도록 찍는 스팟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냥 여기서 찍어버렸다.
숙소에 그대로 귀가할까 하다가 맥주 한 잔 더하고 싶어하는 나. 근처 로손(LAWSON)에 들러서 삿포로 클래식과 주전부리를 잊지 않았다.
한정판에 미쳐하는 한국인답게 이제는 삿포로 클래식을 딸 때부터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짜 이 소리 못잊어...
이때만해도 우리의 체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하루를 꼬박 진심을 다해 돌아다녔음에도 곧장 잠에 들지 않았다. 내일의 일정을 의식한 나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오늘의 그 설레는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이여사에게 '러브레터'를 보자고 제안했다. 유튜브에서 간단하게 결제만 하면 되는 컨텐츠였는데, 일본이라서 일본어 자막이 기본인 영상을 결제 해버렸음 ㅋㅋ 다시 한국어로 된 ver.를 결제하고 한편을 꼬박 다 보고 잠에 들었다. 그 유명한 '오겡끼데스까~'가 무엇인지 알게되었고, 내일 있을 일정을 더욱 더 기대하게 된 우리.
잘 돌아다니고, 잘 먹고, 잘 마시고 했던 간단한 일정이었지만, 첫눈이 주는 설레임처럼 너무 즐거웠던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혼자였다면 순수 무결한 무언가를 상상 했다거나, 나의 기진한 직장생활 위로 한 풀 한 풀 쌓여가는 솜사탕같은 눈들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만큼은 옛날에 이여사와 함께했던 눈 오늘 날에의 추억들이 떠올라서였을 것 같다. 우리는 오늘부터 너른 도화지에 즐거운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