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해도 눈이 다 녹고 없었는데, 아침은 다시 하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 비에이와 후라노 가이드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오늘의 이 여행을 위한 환상적인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역시나 자유여행과는 다르게 정해진 장소와 시간이 있었다. 마침 어제 오타루로 가는길에 잠시 지나쳤던 장소였고, 그곳은 삿포로 TV타워 앞이었다. 버스가 두 대 정차되어 있고 그 앞으로 가이드로 보이는 남자분이 명단이 적힌 종이를 들고 체크를 하고 있었다. 버스가 구분되어 운영되고 있었는지, '이 버스를 타셔야 됩니다'라고 분명하게 안내를 해주던 정일도 가이드 님.
오랜시간 배낭여행을 해오던 나는 가이드투어가 정말 익숙하지 않았다. 낯간지러운 가이드의 자기소개부터 조용하고 싶은 순간에 시끄러운 안내멘트들을 계속 듣게될 것 같았고,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장소에서는 허겁지겁 서둘러 버스를 타야할 것 같았다.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만 있어야 한다는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기 위한 여행의 목적과 정 반대의 방향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가이드투어가 정말 못미더웠지만 비에이/후라노 여행을 준비하면서 걱정했던 '운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건 가이드 투어 뿐이기에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가이드가 이루어졌다. 홋카이도의 기본적인 역사로 시작된 가이드의 코멘트는 꽤 흥미롭기까지 했다. 홋카이도 지방의 개척사. 원래는 소수 부족(아이누 족)이 살고있던 이 불모지 땅이 개척되기 시작한 건 근현대로 접어든 메이지 시대이며, 일본 북방 개척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홋카이도의 '도(道)' 역시 섬을 의미하는 '도(島)'가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히 북쪽에 위치한 섬이 아니라 북방으로 향하는 교두보로 생각했다는 걸 뜻한다고 했다. 다만...미국이 미국 서부땅에 거주하던 인디언들을 핍박하고 몰아낸 역사에 대해 '개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역겨운 역사의 잔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닥 다를 건 없어보였다.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우리나라의 역사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개척의 역사는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역사이야기에 잠든 이여사.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많이 졸았을 것으로 감히 예상해본다.
얼마 안가서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삿포로 시내와는 차원이다른 눈의 높이에 한 번 놀라고, 잘 정리된 통행로에 두 번 놀라고, 깨끗하고 예쁘게 흩어지는 눈의 모양새에 세 번 놀랐다. 좀 찾아보니 홋카이도 지방은 우리나라에 비해서 매우 추운 상태에서 내리는 눈발이라 눈이 파우더 형태처럼 입자가 작다고 한다. 한국의 함박눈처럼 잘 뭉쳐지거나 꾸덕한 느낌은 많이 없었다.
첫 번째로 이동했던 마일드 세븐 언덕. 이전에 마일드 세븐이라는 담배 광고에 나오면서 지금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언덕이 사유지라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을 건너 언덕을 밟고 내려가면 절~대 안된다는 것! 원래는 나무가 빈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일부 비매너 관광객들 때문에 빡친(?) 사유지의 주인이 나무를 잘라버리기 시작했다고...
버스에 내린 순간부터 쉴새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우리 가이드도 특정 스팟에서 찍어야 사진이 잘 나온다며 사진기사를 자청해서 사람들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찍은 사진의 양은 많았으나, 하필 바람이 엄청나게 불고 있어서 둘 다 대빡이 사진으로 나와서 막상 건진 사진들은 몇 없었다는... ㅠㅠ
이여사는 나름 좋은 사진을 만들려고 애쓰다가 다리로 풀스윙을 하며 넘어지기 까지 했다... ㅎㅎ
(다친데 없어서 다행 ㅠㅠ)
마일드 세븐 언덕 바로 옆에는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가 있었는데, '세븐스타 나무'라고 했다. 이것도 마일드 세븐 언덕과 마찬가지로 세븐 스타라는 담배 포장에 배경으로 사용되면서 유명해졌다고... 일상에서 흔히 보기 힘든 잔가지가 많은 나무라서 그런지 사진을 찍으니 조금 신비한 느낌이 나기도 했다. (루앙프라방의 생명의 나무?와 같은)
나름 부탁하면 다 해주는 이여사. 엊그제 봤던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을 연출해본다.
"와타시와 겡끼데스~"
패치워크로드에서 아주 조금 이동해서 도착한 켄과 메리의 나무. 이 나무도 닛산 자동차의 광고에 등장하면서 그 배경음악의 제목이 '켄과 메리 - 사랑과 바람처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데 이쯤되니까 궁금한 게, 왜 죄다 광고에 등장했던 내용을 나무들의 이름에 붙였을까? ㅎㅎ
버스가 비에이역에 도착했다. 비에이(Biei)의 뜻이 뭔지 궁금해서 좀 찾아봤는데, 아이누어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그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 중인 이 곳.
우리는 출발 전에 지급받았던 맛집 로드맵을 기준으로 각자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정해진 시간까지 버스로 돌아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추운 날씨 때문에 당연히 국물요리를 곁들이고 고품질의 돈가스를 먹어야 된다고 셀프라이팅을 시작했다. 이미 비에이 마을에 진입한 시점부터 방향감각을 익혀두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주빠른 걸음으로 다이마루로 직행. 다른 일행들보다 가장 먼저 식당에 도착했으나 우리 앞에 이미 다른 버스팀으로 추정되는 그룹이 웨이팅을 하고 있었다. 3팀 정도였는데, 15분을 기다리니 입장할 수 있었다. 그 기다리는 15분 동안에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눈장난을 치는 이여사(3세로 추정됨)
우리는 원래 '준페이'라는 맛집을 들르는 일정이 포함된 투어를 예약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필 월요일이 휴무일이라서 준페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에비동은 나중을 기약했고, 이거때문에 소규모 인원 투어가 취소되서 결국 엔데이트립 버스투어로 변경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다아미루의 훌륭한 돈가스를 먹기 위한 빌드업(?)이 아니었나 싶다.
창가의 제일 좋은 자리에 안내를 받은 우리는 곧장 우동과 돈가스를 시켰다. 멀리 일본까지 가서 우동이랑 돈가스를 먹느냐 싶겠지마는 닭육수 베이스의 깔끔한 우동과(살짝 심심하긴 했지만) 때깔좋고 부드러운 로스카츠는 현지에서 먹어야 제 맛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더군다나 추운 겨울에 밖을 돌아다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먹는 이 따뜻한 음식들은 그 어떤 음식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황홀했다... 맛나게 점심을 챙겨먹은 우리는 화장실까지 옴팡지게 해결...
밖으로 나서니 어느새 눈은 멈춰있었다. 아까 버스에서 내린 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덕분에 많은 시간을 세이브했고, 카페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려 했으나, 월요일은 단체로 쉬는날이라고 지정이라도 한듯이 오픈한 카페가 많지 않았다.
걷다보니 어느새 비에이역까지 와버린 우리. 비에이는 건물마다 출생연도를 이마(?)에 새기고 있는데, 마침 이여사와 같은 해에 태어난 건물을 발견해서 찍어봤다. 이여사는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는 중 (서열 정리 중)
버스가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바로 근처에 보이던 편의점에서 즉석으로 만들어먹는 커피를 사먹었다.
홋카이도 여행의 핵심이었던 크리스마스 트리.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고요함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고, 햇빛이 그 고요함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눈덮인 세상이 어찌나 조용하던지 우리의 목소리가 낮게 잠길 정도였다. 가이드 말로는 너무 눈이 많이 오는 날씨여도 눈발때문에 시야가 흩어져서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오늘은 정말 완벽 그 잡채라고...
일단 이곳은 다른 관광지처럼 사유지라서 들어갈 수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흔적이 없어서 눈이 쌓이면 언덕 모양이 이런식으로 아름답게 나온다고 한다. 한국이었음 벌써 이 곳 주위로 노점상 생기고 난리 났겠지...
가이드에게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는데, 여러가지 방법으로 포즈를 권유하기도 했다. 손바닥에 나무 얹기, 하트 만들기 나무 옆에 적당한 거리에 서기 등등, 사진이 그닥 마음에 드는건 많지는 않았지만 엄청 노력하시긴 했다.. ㅋㅋ
사실 이 사진을 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이후로 수많은 버스가 줄지어 도착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진을 찍기 위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정말 좋은 각도를 확보하기 위해 조금은 걸어야 했다.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궂은 날씨와 수많은 사람들을 이겨내야 한다고 했으나... 이겨내지 못한 사진중의 하나. 숙소에 돌아와서 이 사진을 보는 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는 후문... ㅎㅎ
오늘만치 사진이 잘 나오는 날이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하루. 이 숨죽이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날씨를 사진과 함께 남기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쭈그려 앉아서 찍기도 하고 서서 찍기도 하고 가로로 찍기도 하고 세로로도 찍어봤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냥 사진이 잘나와서 그런거다. 이런 컷이 유명하니까 어울리는 색깔의 옷을 준비해서 오는 사람이 많았다. (e.g. 쨍한 하늘색 스웨터 등) 사진을 위해서라면 추위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패딩을 내던지는 열정은 기본이었다. 사진은 공소시효가 없으니까 말이다. 근데 나이 서른을 넘긴 우리는 추위를 이겨내는 것이 우선이라 패딩을 포기할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름 이런 사진을 건져낸 것에 만족ㅋ)
뒷편에는 이렇게 작은 언덕 위에 눈이 쌓여있었는데, 이런식으로 와이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눈밭에 누워 손과 발을 허우적대고 있다. 이여사도 홋카이도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다고.... (-_-;)
우리는 신나는 사진찍기 시간을 마치고 탁신관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