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오늘은 교통패스를 끊고 하루종일 돌아다녀야 할 만큼 일정이 꽉꽉 차 있는 하루였고, 오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호텔 내에는 별도의 식당이 없고, 주변에 제휴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사권을 제공해주는 형태였다. 멀리갈 필요 없이 우리는 바로 앞에 위치한 작은 식당에 들어갔고, 가이센동이 포함된 아침 정식과 미소라멘을 주문했다. 가이센동은 해산물을 뜻하는 '가이센'과 덮밥을 의미하는 '동'의 합성어이다(부타동, 가츠동처럼). 말 그대로 해산물을 주 재료로 한 일본식 덮밥인데, 아무래도 신선한 해산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가격도 저렴하고 재료도 너무나 신선했다. 해산물이 주요 식단이 아닌 우리에게 정말 낯선 향들과 재료들이었지만, 정말 '신선함' 하나 덕분에 맛있고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밥을 먹으니 따끈한 커피가 생각난다며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를 이용하는 이여사. 휴게실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는 부장님처럼 나왔다.
숙소에서 하코다테 역으로 가는길에 수산시장이 보였다.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우리는 홋카이도의 향토음식 중 하나인 털게를 만났다. 털게는 이름 그대로 몸에 털이 북실북실 나 있고 오렌지색의 껍질이 돋보이는 게다. 게 종류가 꽤 있지만 개중에서도 진한 풍미의 부드러운 내장, 달콤하고 향이 깊은 살 때문에 현지인들도 털게를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새초롬하게 다리를 모으고 있던 털게에게 인사를 하고 슥 지나쳐본다.
역에 들러 하코다테 시티의 트램을 무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원데이 패스를 구매했다. 트램을 타본다 타본다 해놓고선 포르투에서도 타보지 못했는데, 드디어 이곳에서 타게 됐다. 하코다테의 명소들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게 아니다보니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항상 여행 안에서 아날로그를 경험할 수 있는데, 오늘도 그랬다. 티켓을 받고 마치 복권처럼 긁어서 내가 이용하는 날짜를 셀프로 벗겨내면 되었다. 마치 여행 일기장의 말머리처럼 느껴졌다.
2023년 1월 11일. 흐림.
스이이잉~ 소리를 내며 마치 빙판길을 미끄러져 가는 듯한 하코다테의 대표적인 교통수단 '시덴'. 우리의 첫 여행지는 원숭이 온천이 위치한 하코다테 열대식물원이었다. 10정거장도 더 지나서 가야해서 편하게 앉아가기로 했다.
하코다테의 노면전차는 뒤로 탑승해서 내릴 때 기사님에게 자신의 티켓이나 원데이 패스권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구간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보통 200엔~250엔 정도 인 걸로 봐서는 오늘 원데이 패스를 끊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오늘은 주말이 아닌 평일이었는데, 다들 출근을 하고 계셨던 걸까?
유노카와 온센 역에 도착 후 20여 분 정도를 걸어야 했는데, 이곳은 하코다테에서 나름 유명했던 온천장이 모여있는 곳이다. 가끔 강변을 바라보면 슬그머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이 온천이구나를 짐작케 했다. 온천물이 흐르는 곳 옆에 두껍게 쌓인 눈이 아이러니하게 보이기도...
도보를 걷다보면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는 맨홀뚜껑인데, 역시나 일본 사람들의 섬세함과 지역의 특산(건물, 음식 등)에 대한 어필은 여기서도 엿볼 수 있었다. 하코다테 앞에 놓인 쓰루가 해협은 오징어의 명산지라고 한다.
이여사가 홋카이도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라고 했던 원숭이온천. 하코다테의 야경도, 모토마치 거리의 조명도 참 예뻤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여기서 처음보았다. 동물원과 무엇이 다를까 싶냐마는 세상에 살다살다 원숭이가 온천 즐기고 있는 모습은 처음본다면서 증말 한참을 바라보고 깔깔댔던 이여사.
입장권을 구매할 때에 원숭이 간식을 같이 구매할 수도 있는데, 이 원숭이들도 우리가 먹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박수를 치는 원숭이도 있었고, 뜨끈한 물에서 몸을 푹~ 담그고 있다가 잠깐 밖에 나와서 건조시키는 원숭이도 있었다. 추운날씨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좋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온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인간이랑 다를 게 없었다. 그냥 슥~ 지나치고 식물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원숭이들 하는 행동들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보다가 들어갔다.
식물원은 여느 식물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잠깐 하얀세상에서 벗어나 초록색이 가득한 이곳에서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몸의 피로가 해소되는 기분을 잠시 느꼈다. 잠시 힐링을 하고 다시 나와 원숭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우리는 교로카쿠로 향했다.
교로카쿠에 도착한 우리는 티켓을 끊고 들어갔다. 우뚝 솟아있는 전망타워를 교로카쿠로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그 아래 별 모양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요새'를 지칭한다. 그 바로 옆으로 높은 타워가 있어 전망대로 올라가 하코다테의 시내와 교로카쿠를 조망할 수 있다. 교로카쿠의 뒷편으로는 어제까지만해도 하코다테의 멋진 야경을 담당하던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어제 갔었던 전망대가 하늘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봄에는 교로카쿠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천 여 그루의 사쿠라 나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한다. 겨울에도 '온통 하얀 세상'이라는 나름의 고귀한 멋이 있어 눈이 즐거웠다. 그동안 내렸던 눈 때문인지 교로카쿠의 성곽과 해자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살짝 아쉽긴 했지만 오각형으로 분명하게 구분된 모양은 변하지 않았다.
교로카쿠는 웬만한 각도로는 한 샷에 잡히지 않아 사진을 찍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광각으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못생기게 나와서 잘 이용하지 않는데, 오늘만큼은 제 역할을 해냈다. 광각 촬영기능 개발자분께 칭찬스티커 1개 드립니다.
전망대 안에서 점심먹을 곳을 찾다가, 2층의 카레집은 너무 비싸기도 했고 심지어 브레이크타임이라서 들어갈 수 없었다. 추운 탓에 뜨끈한 국물을 먹을까 아니면 초밥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망대 바로 앞에 위치해있던 회전초밥 집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공간에 준비된 닷지테이블에 앉으니 즉시 세팅된 따뜻한 미소장국과 메뉴판. 가격 범주가 상당히 넓었는데, 일단 비싼 친구들로 입가심을 하는걸로... ㅎㅎ 장어, 참치, 돔 등 다양한 친구들로 10 접시 가까이 먹었음에도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에 놀랐다. 누군가 홋카이도에 오면 평생 먹을 만큼의 해산물을 먹고와야 본전하는 거라고 했는데, 맛이나 가격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아서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식당을 나온 우리는 교로카쿠를 산책했다.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사열을 갖추어 서 있었다. 그 사이로 들이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벤치에 앉아 나름 느낌있는? 사진을 건져낸 우리.... ㅎㅎ 벚꽃이 한창일 때 어떤 모습 일지도 상당히 기대됐던 곳이다.
산책로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강아지도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늙은(?) 몸만 아니었다면 나도 냅다 그렇게 뛰면서 눈밭을 구르고 싶었다. 이렇게 소심한 장난을 치는 이여사.
오타루에서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롯카테이에 들렀다. 이곳은 굳이 찾아서 들어온 건 아니고 산책하다가 우연히 나무밭 건너로 보였던 곳인데, 통창으로 된 뷰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과류 같은 기념품만 파는 게 아니고, 안에 카페도 있어서 차 한잔 가기로 했다.
들어가니 이미 카페 자리는 만석이었고, 다행히 많이 기다릴 것 같지는 않아서 웨이팅 명단에 이름을 기재하고 호명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기념품 샵을 둘러봤다.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통창뷰가 정말 멋졌는데, 계절마다 바뀌는 커다란 액자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받은 자리는 안쪽 자리는 아니고 통로쪽이라 통창뷰가 그대로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왔어서 디저트 설명만 보고 무작정 주문한 우리. 시즌 한정메뉴인지는 모르겠는데, 감자로 만든 디저트를 하나 시켰다. 외양만 봐서는 감자에 도대체 무슨짓을 한 것이냐고 속으로 꿍시렁거렸는데, 스푼으로 한 입 떠서 혀 끝에 닿는 순간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으깬 감자에 설탕을 넣고 버무려서 주시면 숨도 쉬지 않고 숟가락으로 퍼먹어서 없애버리곤 했는데, 그 간식이 마치 진화한 느낌이었다. 감자로 이렇게 고급진 수플레같은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홋카이도 지방의 감자 맛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향도 좋거니와 같은 감자임에도 뭔가 꽉 차 있는 듯한 느낌 덕분에 입안이 풍부해지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디저트를 시키면 커피가 무한리필이라 덕분에 커피도 원없이 먹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미리 검색해 둔 주류삽에 들러 괜찮은 위스키가 있는지 둘러볼까 했다. 지도에 표기된 대로 따라 왔으나, 왜 하필 오늘이 휴일인 것... 수천 걸음을 걸었으나 결국 득템은 하지 못한 채 숙소 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때 즈음에는 몸이 지칠대로 지쳐서 트램 안에서 녹초가 된 채 잠이 들었다.
우리가 숙소 근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로 숙소 근방에는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가 있다. 1909년에 창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을 전면개편하여 만들어진 상점이자 쇼핑가라고 한다. 안에는 잡화랑 기념품 위주의 샵들이 대부분이라 윈도우 쇼핑만하고 나왔다. (하마터면 또 충동구매 할 뻔...)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붉은 벽돌의 건물이 참 낯설었다. 아파트의 콘크리트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이런 붉은색이 주는 따뜻한 감성이 그리웠었나보다.
여행이 어찌어찌 하다보니 러브레터의 흔적 따라가기가 되어버렸는데, 그 하이라이트는 모토마치 거리였다. 여전히 녹지 않고 단단하게 얼어있는 얼음 때문에 이곳에 오기까지 진땀을 흘렸다.
쭉 뻗은 내리막길 도로의 양쪽에는 조명을 칭칭 감은 나무들이 주욱 서 있고, 이따금씩 차들이 바다를 마주보며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스테이지의 주인공처럼 짜잔~ 하고 나타나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위치만 잘 선택하면 아래쪽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잘 가릴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어려웠던 건, 차도를 제외하면 갓길과 계단, 언덕길이 모두 빙판길이라서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좋은 사진을 남기려면 아무래도 촬영 사진의 물량(?)이 뒷받침 되어야 했기에, 차가 내려오는 동안에는 갓길로 비키고 다시 도로에 복귀하는 상황이 많았다. 이래서 하체운동을 열심히 해야하나 싶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땀이 다 날 정도이니...
낮에 바다가 더 잘 내려다보일 때 다시 온다면 더 멋지지 않을까해서 내일 오전에 한 번 더 오기로하고 내려간 우리. 내려가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아마 우리가 가장 고대하던 여행코스(?) 중에 하나였던 위스키 바. 사전에 예약하진 않았지만 어느정도 웨이팅을 감수하더라도 우리가 꼭 마셔보고 싶었던 야마자키 12yrs를 합리적인 가격에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예약석은 가득 차 있었지만, 바텐더 앞 테이블은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능숙한 Greeting과 함께 간단한 핑거 푸드가 서빙되었고, 우리는 위스키 하나에 칵테일을 시켜보기로 했다. 한국의 위스키 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도 힘들거니와, 일본에서 조차 주류매장에 야마자키가 보이면 싹 다 털어가는 '위스키 붐' 시기여서 이곳에서 못마셔보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는데, 운이 정말 좋아서 첫 오픈 후의 첫 니트잔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를 담당하던 바텐더도 오늘 정말 운이 좋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ㅎㅎ 이여사는 올드패션드라는 칵테일을 시켰는데, 얼음을 꺼내 그 자리에서 카빙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셨다.
야마자키와 올드패션드 이후에 바텐더의 추천을 받아 미야기쿄와 요이치라는 위스키도 각 1 니트씩 주문했다. 쉐리타입의 위스키와는 달리 약피트의 연한빛깔의 위스키였는데, 탈리스커 같이 약국을 통째로 갈아 마시는 듯한 강피트의 느낌과는 달리 은은한 약초 느낌이 있었다. 이래서 위스키 좀 많이 마셔봤다 하는 사람들이 피트를 종교처럼 모시며 '피멘'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ㅎㅎㅎ 피트를 더욱 즐겁게 해 줄 하몽도 같이 주문했다. 이쯤되니 술이 맛있는건지, 아니면 분위기가 맛있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기분좋은 음주 후 귀가한 우리. 숙소에 가는 길에 여기저기 불이 켜져있던 편의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맥주를 사고 말았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로 매일 매일이 음주엔딩이었는데, 이런 관성은 오늘도 지속되었다. 맛있는 술은 참기가 힘든걸 어떡해....
일단 하루의 노곤함을 풀어내기 위해 상층의 노천탕을 방문한 우리. 역시나 남탕과 여탕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일본은 일정 시간을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의 탕을 바꾸는 게 일반적인데, 그 기유는 음양의 조화를 통해 양성의 기를 보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당황하지말자). 우리는 어제처럼 뜨끈한 온천탕에 몸을 담구고 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온천 후 시원한 맥주가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오니 마치 수면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또 기절~ 생각해보면 우리는 잠은 정말 잘 잔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