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마찬가지로 산뜻하고 신선한 해산물로 시작한 우리는 오전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제 한밤의 모토마치거리가 너무 아쉬웠던 우리는 트램을 타지 않고 산책 겸 슬금슬금 걸어갔다. 날씨가 워낙 많이 풀려서 눈이 차츰 녹기시작했는데, 마지막날 그러니까 뭔가 좀 아쉽기도 하고..ㅎㅎ 눈이 펑펑 내리면 또 어땠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아카렌가 창고쪽은 사람이 거의 없고 한산했는데, 어제의 복작복작한 느낌보다는 한산한 느낌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우리의 유난스러움이 고요함을 깨고 있었지만 정적의 한가운데에서 떠드는 기분이 오묘했다.
오전에는 거리 앞쪽의 바다가 정말 잘 보였다. 영화의 중반부에도 이런 거리의 모습이 정말 멋있게 나왔는데 실제로 봐도 정말 아름다웠다. 가끔씩 언덕의 가장 높은곳에서 내려오는 차들이 거리의 맨 끝자락 쪽으로 멀어져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저 멀리 바다의 너울거림도 배경의 한 테두리를 완성해주고 있었다.
산책을 마친 우리는 아직 녹지 않은 눈 때문에 또다시 다리를 후들거리며 내려가야 했다.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실눈뜨고 다녔던 우리.
간단한(?) 아침산책을 마친 우리는 하코다테 역으로 향했다. 역은 한산했고, 우리처럼 상행 기차를 타는 몇몇의 사람들만 보였다. 우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노보리베츠로 향했다.
노보리베츠 역은 정말 작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의 간이역 수준으로 작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막 도착해서 시내 중심으로 향하는 버스티켓을 발권하고 있었다.
버스를타고 20여분정도를 이동하니 노보리베츠 온센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의 숙소는 정류장 바로 뒷편에 위치해 있어 찾기가 쉬웠다.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건너편의 유제품 디저트 카페같은곳의 유리창 너머로 병우유를 팔고 있는걸 보고 가격도 브랜드도 안따지고 바로 구매했다.
노보리베츠는 조잔케이라는 지역과 더불어 온천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유명한 온천장들이 쉬지않고 예약을 받고 있고, 가까운 일정은 풀부킹일만큼 인기도 많다. 우리는 수많은 온천중에서도 타키노야 케칸 타마노유라는 료칸을 예약했다. 이전에 게로의 유노시마칸처럼 방 안에 프라이빗 온천이 딸린 고급온천은 아니었지만 전세탕에서 충분히 온천을 즐길 수 있을것 같았다.
체크인을 기다리며 한 컷. 깔끔한 로비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방이 다다미방 형태라고 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5성급 호텔처럼 말끔한 모던양식의 방과 부드러운 베개가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올드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숙소에서 잠시동안 쉬다가 점심 식사를 하러 밖을 나섰다. 워낙에 얌전한 동네이고 식사를 할만한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숙소 바로 앞에 있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먹었고, 나름 에너지 충전을 마친 우리는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정인 '지옥계곡'으로 향했다.
마을 자체가 크지 않아 걸어가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올라가는길에는 잡화점이 다수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오타루에서 오르골을 충동구매 했던것을 생각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되뇌였던 우리...(이러면서 술 사는데에는 돈 안아끼는 우리....) 궁시렁궁시렁 하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지옥계곡의 입구.
근데... 너는 거기서 뭐하는거니?
지고쿠다니는 활화산 분화구로, 그 안에 수많은 유황이 모이고 여러 번 화산 폭발이 일어나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가까이가면 어느 순간에 내 곁에 왔나 싶을 정도로 유황 냄새가 자욱하고, 주위에 있는 수많은 분화구에서는 증기가 나오는 것을 쉬이 볼 수 있었다. 지옥에 가면 이런 모습일거라 상상하면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노보리베츠의 유일무이한 관광지이다보니(사실 곰목장도 있긴한데 생각보다 멀었다) 입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동네 모든 관광객들이 모두 모인줄 알았음... ㅎㅎ 관광버스를 타고 당일코스로 오신듯한 한국인 아줌마 아저씨들도 무지 많아서인지 한국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멀리서부터 온천장에서 나오는 연기인지 아니면 지옥계곡에서 나오는 연기인지 분간이 잘 안 될 정도로 많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오고나서야 지옥계곡에서 퍼져나오는 굉장한 연기들과 유황냄새가 체감이 됐는데, 이러다가 곧 터지는 거 아니야? 라는 이상한 상상까지 했다. 계곡의 생김새도 그렇고 냄새에 연기까지 가미되면서 마치 재앙의 한가운데 노출된 것 같은 걱정까지 들게했다. 오직 외길로만 나 있는 계곡 한가운데의 산책로를 지나면서 느꼈던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감?들이 이곳을 좀 더 재밌게했던 것 같다
멀리서부터 계속되었던 유황냄새 때문에 이여사는 나에게 자꾸만 방구뀐 게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은 이여사가 뀌었을지도 모른다.
보행로를 따라 중간쯤 들어오니, 정말 이곳이 지옥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에는 생명체라곤 하나도 없고 그늘만 있었는데, 정말로 악마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얼핏 보면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연상하는 듯한 기암괴석들. 사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귀여운(?) 사이즈였다.
우리는 보행로 끝자락에 있는 반환점 같은 곳을 돌아왔다. 물웅덩이에는 동전을 던져 넣는 것이 전세계 글로벌 룰인데, 이상하게도 텅 비어있던 물 웅덩이.
오는길에 참새들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봉다리에 다양한 맥주들을 담았다. 가이세키 이후 전세탕에 몸을 담구고 노곤한 몸을 맥주로 달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도파민이 샘솟는다.
저녁식사는 방 안에 셋팅되는 식은 아니었고, 식당의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차림상을 받는 식이었다. 오자마자 메뉴가 상세하게 적힌 안내지를 건네는 서버에게 뭐든 잘 먹겠다는 스탠스로 아리가또고자이맛스를 연발하면서 은연중에 얼른 식사를 내어달라고 얘기했다(마음속으로). 웃긴건 안내지 안의 내용들이 무슨말인지 하나도 몰랏다는건데, 안내지 안의 내용이 너네한테 똥맛 음식을 제공할거야라고 써있어도 알아낼 길이 전혀 없었다. 그냥 우리가 지불한 금액을 믿어볼 뿐....ㅎㅎ 다행히 맛있는 진수성찬이 준비가 되었다.
메뉴는 꽤 다양했다. 역시나 작은 접시에 '맛을 볼 수' 있도록 조금씩만 담겨서 나왔는데,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파민을 계속해서 갱신할 수 있어 즐거운 식사였다. 티라미수에 꿀을 얹은 아이스크림까지... 그냥 펄펙트
저녁9시에 전세탕을 예약했다. 방안 장롱에 비치되어있던 유카타를 입고 세면도구를 챙겨 1층으로 내려오니 담당직원이 탕으로 곧장 안내해 주었다. 탕이 엄청 큰 것은 아니었지만 바깥공기를 마시며 프라이빗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였다. 전세탕은 언제나 즐거운 이여사.
전세탕은 정말 아담하고 산뜻했다. 노천탕이라서 당연히 바깥의 공기와 닿아있었는데, 따뜻한 온천만 있었기에 추운 날씨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약간은 하늘색 옥빛이 나는 온천탕은 뭔가 신비감까지 느껴졌는데, 마치 선녀가 나올 것 같은 빛깔이었다. 우리는 아까 숙소 앞의 디저트 카페에서 구매한 우유를 온천물에 잠깐 덥히고, 어느정도 따뜻해 진 이후에 뚜껑을 뽕~ 따고 한 모금 딱 들이키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신선도 부럽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몸이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잠깐 환기하려고 열었던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좀 맞으면서 맥주를 땄다. 삿포로 클래식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요 맥주가 오직 홋카이도 지방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맥주의 목넘김 한 번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삿포로 클래식이야 말로 한정판에 미쳐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맥주가 아닐까 헛소리도 해보면서... ㅎㅎ
여행이 중반을 지나 막바지로 가고 있지만, 아직도 내일 하루 일정이 남았음에 잠깐 안도하며 잠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