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행을 가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만 한참을 고민했을 뿐이다. 우리 둘 모두 30대를 지나가고 있는데, 아마도 둘만 이렇게 길게 가는 것이 마지막일것이라 생각했다. 아이에게 하나 좋을 거 없이 부모의 편안과 즐거움을 위한 여행에 '태교여행'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게 참 웃기지만, 그래도 산모의 행복한 기운이 아이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여행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뉴질랜드 여행 이후 무려 7개월 만의 휴가였다.
해외여행을 갈 때에는 늘 처가 신세를 진다. 괜히 우리가 잠자리를 불편해 할까봐 침대까지 양보해주신 아버님 어머님 덕분에 아침을 정~말 개운하게 시작했다. 오전 일찍 비행기타러 나간다고 하니 이렇게 정성스레 사과까지 컷팅해주시는 아버님. 아침사과는 금사과라는데 금을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사과를 먹는사이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 주신 덕분에 공항철도를 타고 편하게 이동이 가능했다.
스타벅스에서 기분좋게 아메리카노를 들고 바로 윗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환전부터 하기로 했다. 환전소가 어디있나 두리번 거리다가 눈앞에 바로보였던 환전소 쪽으로 향했는데, 이게 무슨일이람. 이여사의 초등학교 동창인 H씨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이여사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 넓은 대한민국에서 이 넓은 인천공항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날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 여행의 모든 것들이 마치 트루먼 쇼의 한 장면 같았다.
환전 후에 아쉬운 인사를 뒤로하고 곧장 짐부터 부쳤다. 난생 처음 가보는 Sky Priority Lane은 어색하기 짝이없었다. 정말로 여기로 바로 가도 되는거야?를 서로에게 질문하며(둘 다 잘 모름 ㅋㅋ) 쭈뼛쭈뼛 들어가니 일단은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던 승무원. 임산부의 상태를 체크하는 몇 가지 질문지를 작성한 뒤 짐을 부치고 'Business Class'가 적힌 티켓을 건네받았다. 대한항공이 아닌 게 1% 아쉽긴 했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출국심사를 마친 우리. 게다가 임산부인것이 확인되면 줄서는 것도 거의 프리패스였다. 우리는 곧장 면세품을 수령하기 위해 면세품 인도장으로 향했다. 엄청 대단한 것들을 산 것은 아니고, 시중에서 생각보다 비싸게 판매되고 있는 아가용품들을 인터넷으로 미리 결제하고 이곳에서 수령했다. 천 용품들이라 부피를 덜 차지했고, 부담스러운 무게도 아니여서 여행하는 내내 캐리어에 편하게 넣고다녔다.
이번 여행의 일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항 라운지. 스카이팀에 해당되는 가루다 항공의 비즈니스 항공을 이용해도 대한항공에서 운영하는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면세품 인도장 바로 옆에 있는 마티나 라운지와 그 근처에 있는 KAL라운지를 모두 이용할 수는 있지만, 마티나 라운지는 대기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어 들어갈 엄두도 못냈고, 대신 KAL 라운지를 이용했다. 이륙하기 전 잠깐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별 거 있겠나 싶어 기대 하나 없이 들어갔다.
라운지는 깔끔했다. 구분된 좌석과 테이블 좌석이 있었고, 충전을 할 수 있게끔 개별 플러그도 제공했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왔는데, 마주보고 먹는게 낫겠다 싶어 도서관 테이블같이 널따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빵과 샐러드, 그리고 간단한 한식 종류의 간단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컵라면도 몇 개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빵과 샐러드 위주로 먹다가, 근 일주일동안 한식을 못 먹을걸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한식에 손이 가게 된 우리. 거기에 디저트(?)로 신라면까지 함께했다. 옆에는 주류를 선택할 수 있는 바가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실컷 마실 것이므로 패스. 아주 소소한 식사로 행복한 오전을 보낸 우리.
얼마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을 전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강 신드롬에 빠져있었다. 트렌드에 예민한 이여사는 육식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책을 읽어본다. 이런 가벼운 아이러니와는 다르게 채식주의자라는 책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여사의 표정도 나름 심각했다...ㅎㅎ
라운지오면 한 번쯤은 와본다는 샤워실. 조금 기다리니 미리 전달받은 진동벨이 울려 들어갔고, 개인 타올과 헤어드라이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전에 나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서 땀이 좀 났는데, 아주아주 개운하게 샤워까지 마무리한 나. 거의 비행시간이 임박하고나서야 라운지를 나섰다.
비행기 탑승을 위한 브릿지로 건너가기 전에는 항상 사진을 찍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중간세계(비행기)에 가기 전 마지막 한국 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기내에 들어서고 티켓을 보여주자마자 시작되는 열띤 환대. 처음 경험한 우리에게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돈값하는 티켓은 이정도 서비스는 하는구나 싶었다. 자리에 착석하기가 무섭게 짐 올리는 것을 도와주고, 아이컨택을 하며 이름을 체크하고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주었다. (Mr. Yeo / Mrs. Lee) 웰컴드링크로 선택한 샴페인과 오렌지 쥬스(안타깝게도 이여사는 이번 여행에서 술을 단 한 방울도 못 마신 최초의 여행이되었다)를 서빙해주며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이불도 꺼내 우리의 다리를 덮어주었다.
우리가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셀카를 찍고 있으니 '둘이 같이 찍어줄까?'를 물어보았다. 보통은 핸드폰을 들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가 일상인 여행자들에겐 이런 친절조차 새로웠다.
일단은 개인에게 지급된 어메니티부터 살폈다. 어렸을 때 사용했던 전자사전의 패키징처럼 생긴 파우치 안에는 칫솔, 치약, 빗, 로션, 미스트, 립밤, 그리고 안대가 담겨 있었다. 이코노미에서는 한 번 닦으면 부러질 것 같은 칫솔과 누가 쓰다남은 것 같은 째만한 치약만 준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구성이었다. 그리고 파우치 제일 안쪽에는 승객이 발 시려울 걸 생각해서인지 까만색 양말도 한켤레 있었다.
우리는 오전 11시 25분 비행기를 선택했는데,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이륙하고 30분~1시간 이내로 식사가 서빙된다고 했다. 바로 앞 수납함에 마련되어 있던 메뉴판을 꺼내들고 어떤 메뉴가 있나 살펴보니, 간단한 코스요리가 서빙되어 나오는 점심식사가 준비된다고 했다.
International Cuisine과 Korean set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이전에 가루다 항공에 대해서 한창 찾아볼 적에 대한항공과는 달리 한식 메뉴가 그저 그렇다는 후기를 본 적이 있어 우리 둘 다 International Cuisine을 선택했고, 각각 생선요리, 그리고 고기요리를 골랐다. 메뉴판 밑에 작은 글씨로 이슬람 원칙에 따라 준비되었다는 주석이 있었는데, 뭔가 이러한 사유로 메뉴가 제한적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e.g. 돼지고기)
따뜻한 식전빵과 함께 준비된 간단한 사과&치즈 에피타이저. 이름은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구성을 보니 직사각형 모양으로 커팅된 사과의 사이에 치즈가 샌드위치마냥 토핑된 간단한 요리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구성이냐? 싶다가 한 입 베어물고나니 식감에 한 번 놀라고 단짠의 원투펀치에 두 번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 뒤에 나올 메인음식을 한 껏 기대하게 만들어 준 에피타이저에 박수를 치며 ... (이 에피타이저가 식사중에 제일 맛있었다는 후문)
이여사가 주문한 비프스튜와 폴렌타. 사실 하늘위에서 스테이크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고, 당연히 조림이나 스튜 형태로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거기에 예쁘게 형형색색 플레이팅되어 나온 야채 가니쉬들이 열일을 하는 디쉬였는데, 신기한 것은 같이 나온 노란빛의 폴렌타(Polenta)였다. 처음에는 매쉬드 포테이토가 잘못 요리되어 나온건가? 싶었는데, 여행을 마치고나서 찾아보니 옥수숫가루 등의 곡물가루를 넣고 끓인 '죽' 형태의 이탈리아 요리라고 한다. 여기에 치즈를 블렌딩해서 약간 되직하게 으깬 형식으로 만들어 낸 것 같은? ㅎㅎ 알고먹었으면 조금 더 생각하면서 먹었을 것 같은데 살짝 아쉬웠다. 맛이 아마도 직관적이지 않아서 이게 뭐지? 싶었던 것 같다.
곧장 서빙되어 나온 나의 요리. 리카리카 소스라는 동남의 특유의 향을 내뿜는 매운소스와 간이 잘 된 야채와 밥이었는데, 이전에 뉴질랜드에서 먹었던 피쉬를 생각하고 먹었으나, 그냥 쏘쏘한 생선구이 정도였다. 애초에 갓 튀겨내어 바삭함의 위용을 자랑하는 뉴질랜드의 피쉬와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그냥저냥 먹을만한 정도였다. 같이 나온 초콜릿무스 케이크는 혈당스파이크가 오는게 느껴질 정도로 달았다. (대충 맛있긴 했으나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는 이야기)
메뉴 판 오른편에 Light meal이라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주전부리 메뉴가 있었는데, 우리는 일말의 고민 없이 한개씩 주문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먹는 고기 꼬치 구이인 사태(Sate)구이와 닭가슴살과 바질토마토 소스가 토핑된 파니니를 부탁했다. 솔직히 사태구이는 좀 기대했는데 그냥저냥 고깃덩어리 구이라서 좀 실망했다는 후문 ^^;
이렇게 사육을 당하다보니 어느덧 도착해버린 발리 덴파사르의 응우라이 공항.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 해사 뉘엿뉘엿 안녕을 고할때였다. 첫날부터 발리의 석양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라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우라이 공항에 도착하고 임산부 패스트 트랙으로 입국심사까지 신속하게 마친 우리는 가장 먼저 튀어나온 캐리어를 신속하게 집어들고 반팔부터 꺼내 갈아입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날씨는 후끈후끈했고, 습한 날씨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몸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공항을 완전히 빠져나와서 미리 예약해 둔 클룩의 공항픽업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클룩 대기장소로 왔다. 18시 30분 출발이라 10분 미리 도착해서 기다렸는데, 오히려 10분이 지난 18시 40분이 되서야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공항 근처가 워낙 차량이 많아서 늦은거야 이해할 수는 있는데, 이사람들은 사과따위는 하지 않는건지 허허허허 그냥 웃기만... (조금 섭섭)
우리가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에는 이미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고, 첫날의 스미냑 석양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대신에 엄청나게 많은 도로 위 인파와 바이크(오토바이)들을 구경하며 40여 분 정도를 달려서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스미냑(Seminyak)'이라는 곳인데, 바닷가에 인접해있어 고급 리조트들이 즐비하게 있고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함께 끝내주는 석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호텔에 들어온 우리는 내리자마자 알 수 없는(?) 환대를 받았다. 플루메리아(Plumeria)라는 꽃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남녀할거 없이 걸어주었는데, 목에 걸자마자 은은하게 퍼지는 꽃 향기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보통 전통 목걸이의 재료로 주로 사용되고 환영, 사랑, 감사의 의미로 전달이 되곤 한다네. 태어나서 처음 걸어보는 꽃 목걸이에 당황한 한국인 2명은 어찌어찌 호텔 안으로 들갔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우리는 생강이 들어간 웰컴드링크와 함께 체크인을 시작했다. 장기간 비행기를 타고 도로 위에서 한참동안 있었어서 꽤 피곤했는데, 이여사는 오죽했을까 싶다.
안내받은 방을 둘러본 우리는 방의 컨디션에 만족했다. 방 사이즈도 꽤 컸고, 화장실도 생각 이상으로 깔끔하고 모던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창문 바깥으로 보였던 호텔의 정원뷰였다. 정원뷰가 궁금해서라도 얼른 나가봐야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봐 두었던 호텔 내 다이닝이 밤 10시까지 운영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주저할 거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호텔 로비쪽으로 가는 중. 아까 체크인 하고 방으로 올 때에는 몰랐던 호텔의 아름다운 전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동남아에서만 볼 수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우리를 반겼다.
로비에서 알려준대로 산책로 끝에 보이는 채플을 지나 수영장을 가로질러가면 식당이 있을 거라 했다.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호텔의 분위기가 꽤 괜찮아 보였다.
우리가 갔었던 식당은 호텔 내 위치한 Sanje Restaurant & Lounge인데, 맛은 모르겠고 늦은 시간에 밖에 나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 선택한 식당이었다. 선택지가 없어 선택한 거 치고 바로 앞에 파도소리가 들리는 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가격은 조금 비싼 편)
이여사에겐 미안하지만 일단 가볍게 식전주로 '스미냑 블루'로 시작. 파워에이드에 소주를 섞은듯한 비쥬얼에(섞어본 적 있음) 팬지꽃을 위에 얹어낸 칵테일이었는데, 포트와인처럼 달고 독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식전주로 마시기에는 초큼 독하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식전빵으로 보이는 빵과 스낵류, 그리고 한입에 넣을 수 있는 핑거푸드가 나왔는데, 우리가 시킨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 그래서 이거 free냐고 물어보고 난 이후에 먹었다... ㅎㅎ 메인디쉬로는 송아지의 정강이살이 토핑된 리조토와 해산물 파스타, 그리고 사이드 디쉬로 야채볶음을 주문했다. 우리 부부는 생각보다 음식 안가리고 막 먹는 편인데, 살짝 애매한 맛이었다.... 그냥 전망값이다 하고 해결했던 식사.
발리에서의 첫날이 기울어 간다. 비행기가 좀만 더 일찍 떨어져서 오후 5~6시쯤 도착했다면, 스미냑의 아름다운 석양을 한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아쉬움에 잠깐 들렀던 호텔의 인피니티풀. 내일은 반드시 꼭 무슨일이 있어도 와야지 다짐하며 호텔을 슥 둘러보고 꿀잠에 든 우리. 얼른 피곤함을 잊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