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침은 길고 또 길었다. 일어나는 시간을 정하지도 않았고, 어디가서 뭘 할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인터넷으로 몇 번 검색만 해보고 여기 좋은데? 여기 가볼까? 정도만 얘기했을 뿐, 몇 시에 여기 가고 몇 시에는 여기를 갈꺼야~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휴가에서 절대 익숙하지 않은 '자연기상(알람을 맞추지 않고 일어나는)에 아침을 깨우고 커튼을 촤르르 걷어 숙소 바깥 풍경이 어떤지부터 살폈다. 연꽃이 피어있는 정원에 키높이 구두를 신은 야자수, 살랑이는 바람에 나부끼는 초록정원이 마음을 너무 편안하게 했다. 내가 부스럭대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이여사도 얼떨결에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가볍게 아침 산책을 해 본다. 어제 한참 어두웠을 때 호텔에 도착해서 호텔 내부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정원을 끼고 있는 풀빌라 건물도 보였고, 바다를 맞대고 있는 인피니티풀도 밝을 때 보니 절경이었다.
산책을 마친 우리는 지체없이 아침식사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은 또 하나의 관광지처럼 멋졌는데, 길 아래에 거대한 연못이 있어 어젯밤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수많은 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국가적인 예술중의 하나인 가믈란(Gamelan)연주가 비로소 우리가 여행을 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간단한 음료와 커피로 시작한 아침식사. 인도네시아식/양식이 준비된 뷔페와 함께 개인별로 계란요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Poached egg w/ salmon과 아보카도 토스트를 선택한 우리. 아침부터 너무 배부르게 먹는게 아닌가 싶다가도 늘 가볍게 먹어오던 관성 때문에 막상 많이는 먹지 못했다. 이여사는 Kwetiau Goreng이라는 면 요리가 맛있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달콤한 간장을 베이스로 한 면요리라고 한다)
가볍게 또 걷기 시작한 우리. 식사를 마친 우리는 도보 10여 분 거리에 있는 스미냑 스퀘어로 향했다. 발리에 오면 열악한 이동환경 때문에 택시로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는데, 호텔 정문을 나서자마자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됐다. 생각보다 덥고 습한 날씨와, 좁디 좁고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걷는게 상당히 불편했고, 임산부인 이여사에겐 힘들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어찌어찌 스미냑 스퀘어까지 도착한 우리는 큰 소득 없이(쇼핑없이) 곧장 그랩을 잡아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 둔 라탄제품을 쇼핑하기 위해 이동했다.
온 세상의 모든 바이크가 모여있던 것 같았던 도로... 여태 많이 걷고 대중교통 이용만 하던 우리였는데, 이렇게 택시만 타고 이동하는 게 참 어색했다.
아시타바(Ashitaba)라는 곳에 도착했다. 조금만(?) 젊었다면 노상시장같은 곳에서 흥정을 하며 남는 에너지를 열심히 쏟아부었겠지만, 나이먹고 휴식이 필요한 노익장들에게는 이런 정찰제 가게들이 반갑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사만하고 쳐다도 안보는 직원. 정찰제다보니 호갱 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우리에겐 더 편했다. 예쁜 제품들을 보니 피곤한 건 어느새 잊어버리고 눈이 뒤집혀 버린 이여사.
무엇이 마음에 드냐는 물음에 아~ 잘 모르겠다고만 대답하던 이여사는 무언가에 이끌려 하나의 가방을 들어올렸다.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린 이여사에게 필요한 것은 '이거 괜찮다 이거 사자'라는 소금 한 꼬집. 이로써 발리에서의 첫 쇼핑이 완성되었다. 이여사는 여행 내내 이 가방을 아주 요긴하게 잘 쓰고왔다. (집에서는 고이 모셔두는 중)
기분 좋은 쇼핑을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스타벅스. 그많은 카페들을 뒤로하고 스타벅스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익숙한 커피에 괜찮은 공간이기 때문. 더군다나 우리가 찾은 곳은 약간 외진곳에 위치한 스타벅스 이기 때문에 한적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스타벅스는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시타바로부터 10여분 정도를 걸어서 겨우 도착한 이 곳.
거대한 나무 문을 이겨내고 들어가면 층고가 엄청나게 높은 스타벅스 내부가 펼쳐진다. 워낙에 큰 매장에 좌석도 널찍하게 벌어져 있어서 뭔가 여유로운 분위기가 물씬 났다.
발리에 왔으니 발리 special 원두를 먹어보아야지~ 하는 생각에 발리 원두를 선택하고(추가금 내야함ㅋ), 데와타(Dewata) 라떼를 주문했다. 라떼라고해서 뭐 특별할 게 있을까 했는데, 기존의 라떼에 팜슈가(Palm Sugar: 야자나무의 수액을 끓여서 만든 설탕)을 넣어 만든 라떼라고 했다. 찾아보니 팜슈가는 당도가 낮고 미네랄과 비타민이 풍부해서 건강에 좋은 설탕이라고 하니 라떼마시고 건강도 좋아지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 보기드문 한적한 스타벅스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지만, 거의 유일한 예약일정인 마사지 샵을 시간에 맞춰 가야해서 부랴부랴 그랩을 잡아 이동했다.
스타벅스로부터 차로 5분 정도를 이동하여 도착한 더 케어데이 스파 스미냑 지점. 예약자를 확인하니 생수와 함께 물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이어서 어떤 오일로 마사지를 받을 것인지 선택하게 하는데, 자스민, 레몬그라스, 그리고 플루메리아 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뭐 알아보고 온 것도 아니고 선호하는 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 플루메리아 향을 선택하고 들어갔다. 플루메리아는 어제 호텔에 입성할 때에 목에 걸린 꽃 목걸이의 그 꽃이었다.
우리는 커플룸으로 안내받았다. 이여사와 나의 마사지사가 배정되었고, Linda과 Candra라고 했다. 일단 신발을 벗으니 발부터 씻겨주는 그들. 준비된 마사지 속옷으로 갈아입고 자기네들한테 신호를 달라고 했다. 약간의 민망함은 보너스 ^^;
나는 Baliness Massage, 그리고 이여사는 Pregnant Massage를 선택했다. 처음에 선택한 오일을 사용하는 오일마사지였는데, 기본적으로 인도/중국/동남아시아의 전통 의학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인도네시아 발리 지방에서 발전한 마사지 스타일이라고 한다. 지압, 피부 롤링 및 플리킹, 그리고 천천히 쓰다듬는 방식의 마사지였는데, 압으로 승부하는 타이마사지나 스웨디시 마사지 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스타일의 마사지였다. 근데 너무 오랜만에 받는 마사지라서 그런지 정말 너무너무 시원하고 혈액순환이 쫙~ 되는 기분이 들더라.
마사지를 마친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나왔고, 우리의 마사지사 언니들에게 10만 루피아씩 팁을 드렸다. 온몸에 피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로비쪽으로 나오니 따뜻한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차를 즐기려 했으나 때맞춰 도착한 그랩 때문에 벌컥벌컥 마시고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그랩 잡히는 속도 실화?)
이것저것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와룽니아(Warung Nia)라는 식당. 어떻게 보면 발리에 도착해서 먹는 첫 외식(?)인데, 나시고랭이나 미고랭이 아닌 폭립을 선택하게 됐다. 폭립이 해봤자 뭐 얼마나 맛있겠어~ 라고 했다가 고기 썰 때 한 번, 입에서 녹는 식감에 두 번 놀랐다. 고기가 좋은건지 숙성을 잘 해둔건지 아주 야들야들하고 부드럽게 썰렸고, 저 크기에 한화로 16,000원밖에 안한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폭립만 먹는것은 당연히 아쉬웠고, 여기에 모둠 사테구이와 미고랭, 여기에 빈땅맥주 Radler를 주문했다. 이여사를 앞에두고 혼자 술을 마시는게 쪼끔(!)은 미안했으나 이미 더운 날씨 때문에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맥주를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음식은 말할것도 없고 맥주도 엄청났다.
숙소로 곧장 돌아왔다. 숙소 근처의 식당이었던 덕분에 5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 들어오니 방청소와 함께 팬더(?)로 추정되는 타올아트가 있었다. 사전에 허니문 여행이라고 코멘트를 남겨두면 타올로 백조 두마리를 만들어주는데, 우리는 따로 그런 코멘트는 하지 않았어서 처음에 살짝 서운하긴 했었다... ㅎㅎ 그래도 처음 마주한 타올아트 덕분에 기분은 좋아진 상태로 오후 일정 시작하기.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기분좋게 밖을 나섰다. 이여사는 임산부 수영복이 안맞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실착도 안해보고 가져옴 무슨베짱?) 다행히 아주 딱 맞고 핏도 괜찮았다. 한국에서 미리 주문해 둔 똘똘이 토퍼도 들고 얼른 수영장으로 고고!
여행가기 전 이여사가 우리의 태교여행을 위해 준비해 온 토퍼. 우리는 비어있는 선배드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볕을 즐겼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은 아니었고 구름이 적당히 있었는데, 오히려 햇빛이 적당히 뜨거워서 나쁘지 않았다.
사실 호캉스를 가도 수영장을 잘 즐기지 않는 우리는 이렇게 선배드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는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싼돈주고 와서 잘 못즐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막상 선배드에 눕고 볕을 쬐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네... 해가 거의 수평선에 가까워질 때 즈음 직원이 나에게 와서 해피아워가 끝나가는데 마감주문 받고 있다고 해서 모히또도 한 잔 하고(1+1 두잔!) 술을 마실 수 없는 이여사는 나쵸샐러드를 시켜서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인피니티 풀에 와보고 싶다는 이여사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서 선택한 호텔이었는데(싱가폴 마리나베이 샌즈에서 묵지 못한 한을 풀기위해) 그냥 이렇게 호텔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물놀이 하는 게 뽕을 뽑는 방법이었다.
이여사는 이 모습을 타임랩스로 담아두고 싶다며 삼각대를 세우고 타임랩스를 찍기 시작했다. 근데 세팅만 하는줄 알았는데 벌써 뭘 시켜서 열심히 먹고있네.
그냥 있는 그대로 이 시간을 즐기는 이여사. 첫 해외여행인 똘똘이도 좋아했겠지? (물속에 있어서 못봤으려나....)
처음에는 한국인의 전통 수영복인 래쉬가드 형태의 옷을 걸치고 있다가, 한국사람들(한국인 한 쌍이 있었다) 말고 아무도 윗도리를 걸친 남자가 없는걸 보고 나도 용기를 냈다(?). 비록 형편없이 늘어진 뱃살과 허여멀건 고깃덩어리 같은 피부였지만 오랜만에 아무 생각없이 아무 눈치볼 거 없이 이렇게 볕을 즐긴다는 게 굉장한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등과 어깨에 선크림을 하나도 바르지 못해서 이때부터 물 위로 나와있는 부분만 아~주 잘 익었다는 후문이.
점점 더 붉어진 스미냑의 석양. 살면서 이렇게 멋있는 석양을 언제쯤 봤을까 하니 몇 없다. 해봤자 포르투 모로정원 정도? 스미냑이 지구의 서쪽과 맞닿아 있어 이렇게 멋있는 석양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석양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고, 이렇게 인피니티 풀에서 몇 시간 동안 이 장면을 기다리며 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건 매일 있는 일이지만, 장소에 따라 특별해 질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꼈던 것 같다.
아까 다섯 시 즈음부터 선배드 옆에 삼각대를 세워두고 돌린 타임랩스가 완성이 됐다. 우리 옆자리에는 모녀로 보이는 여행객이 오랜시간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타임랩스를 찍는거냐며~~ 이여사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며 말을 걸어왔다. 나중에 완성본을 보여주니 자기에게 공유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 흔쾌히 알겠다하고 통성명을 했다. 호주에서 온 플로리스트 였는데, 이번에는 딸과 함께 왔고 발리는 5번째라고 했다. 엄마한테 보내주겠다며 엄청 잘찍었다고 좋아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울 어머니께 곧장 스미냑의 석양을 선물(?)했다
이후에 그 모녀는 수영장에 한참을 있었고, 부서지는 석양 아래서 한참동안 물놀이를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행복해보여서 영상을 찍어 다시 DM을 보냈다. 허락없이 찍은 건 미안하나 너무 아름다워서 안 찍을 수 없었다는 코멘트와 함께 ^^
볕이 막을 내리니 많은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들어갔고, 우리 말고는 더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뭐가 그리 아쉬운 것인지 수평선에 걸쳐있는 붉은 기운을 한참을 바라보며 몇 분을 또 그 자리에서 보냈다. 얼마 안 있으니 수영장에 녹색의 은은한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영장에는 우리 둘 밖에 남지 않아 색감을 살려 사진을 더 찍어보기로 한 우리는 핸드폰의 노출시간을 늘리고 타이머를 설정한 뒤 약속한 스팟에서 한참을 저 자세로 있었다. 그래도 둘이 온 게 아니고 셋이 온 여행이니 기념사진을 꼭 남기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되는건가? ㅎㅎ
하루종일 물놀이를 하다보니 어느덧 밖에 나가기엔 늦어져 버린 시간. 밖에 나가기도 애매하고 어제 갔던 식당을 또 가는것도 좀 그래서 룸서비스를 시켰다. 인도네시아에 왔으니 나시고랭을 시켜야지~ 하면서 주문한 메뉴인데, 우리가 생각했던 나시고랭하고는 쬐~끔? 차이가 있어서 당황했으나 그래도 한국인의 매운맛인 신라면을 챙겨온 우리는 값진 한상을 차려 먹을 수 있었다.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느즈~막이 일어나서 마사지 받고 햇볕 아래서 모히또 마시며 물놀이를 한 우리. 우리가 여행하면서 이렇게 안 걸었던(?) 일정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 일찍 잠에 들었다. 점점 쉬는게 좋아지고 맛있는 음식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걸 보면 나이 먹은 걸 체감하곤 한다. 뭐 나쁜짓 하는건 아니니 내일도 열심히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