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침을 기분좋게 해주는 플루메리아가 길목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나무는 그 자리에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꽃이 피고 지는 건 당연하지만, 마치 앞으로 우리 가족이 될 똘똘이를 위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어제 호텔안에서만 물놀이를 하느라 나가보지 못했던 바로 앞 해변가를 좀 거닐었다. 신발을 벗고 모래를 밟으며 그동안 멀리했던(?) 땅과 나의 거리를 조금 더 좁혀보고, 지도의 경계선에서 츄르르 촤아 소리를 쉬지않고 내는 파도를 밟아보기도 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높아서 잠시 동안 이곳이 가을이라는 착각도 해봤다.
이 해변가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댕댕이들이 목줄 없이 아주아주 자유롭게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물이 있으면 몸을 담그고 체력이 닿는대로 지칠때까지 뛰는 아이들인데 말이다... ㅎㅎ 별거 아니었지만 자유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산책을 열정적으로 해서 그런지 조금 전투적이었던 이여사의 발걸음. 어제 맛있게 먹었던 면 요리가 있는지 검사하러 갔다. 근데, 이게 웬일이람... 요리가 바뀌는 바람에 어제의 면요리는 온데간데 없고 이상하게 생긴 미고랭만 있었다는... ㅠ_ㅠ 이여사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 새로운 음식이 무엇이 있나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식당의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발견한 다소 위협적인(?) 색깔의 음식. 우리나라의 전병같이 생긴 음식이 있길래 하나 들고와서 먹어보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달달구리해서 디저트로 아주 좋은 음식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디저트인 다다르굴룽(Dadar Gulung)이라는 건데 판단이라는 식물의 즙을 섞어 만든 전병에 팜슈가와 코코넛을 넣고 말아 만든 디저트로 밥먹고 후식으로 커피와 함께 먹으면 딱일 것 같았다. 후문이지만 나중에 짐바란으로 이동을 해서도 이 다다르굴룽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조식으로 먹었던 Poached Egg w/ Salmon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같은걸 주문했다. 여행와서 항상 같은 음식을 먹다가 유일하게 이여사와 궤를 달리했던 음식이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서 열심히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몸살 기운이 엄습하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심해졌고,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오늘 우붓까지는 어떻게든 이동을 해야하니 조금 참고 움직여보기로 했다.
체크아웃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미리 찾아봐 둔 KYND 라는 카페로 이동하기로 했다. 캐리어를 싣고 갈 수 있을만큼 낭낭한 고급형차량으로 그랩을 불렀고, 적당히 쾌적한 차량이 배정되었다. 기사가 카페에 갔다가 어디 가느냐 물었고 우붓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하니 자기 차를 타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영업을 했다. (영업 꽤 잘하는데?) 이따가 또 다른 차량을 부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기도 하고 캐리어를 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끙끙댈거를 생각하면 꽤 괜찮은 제안같아서 오케이라 했다. 캐리어를 훔쳐가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했으나 우리에게 건네준 명함에 여러가지 투어, 이동편 제공 등 애초에 여행자들을 위한 투어 및 이동서비스를 하는 기사님 같아서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어차피 캐리어 안에는 중요한 것도 없었기도 했고...
카인드는 옷과 악세서리를 편집샵과 카페를 겸해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처음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카페 안에 자리가 없어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를 받았는데, 나는 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하품이 계속 나오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샵 바깥 입구쪽은 이렇게 분홍색 데코로 꾸며져 있다.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건지 하품이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배고픈건 고사하고 뭔가 입에 넣기만 하면 토할것 같은 기분 때문에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던 건 이여사가 아프지 않았다는 것... 이여사가 그랬으면 약도 못먹고 답이 없는 상황이라 내가 아픈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리에오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아사이 볼(Acai Bowl)과 딸기라떼, 그리고 소화에 조금은 도움이 될까 싶어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아사이 볼은 원래 하와이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데, 스무디 베이스에 그래놀라와 과일을 덮어 만든 파르페 형태의 음식이다. 위에 'BALI'의 글자를 그대로 딴 파파야, 비트, 딸기, 바나나 토핑은 도저히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한 스푼 떠먹고 맛이 꽤 괜찮아서 우걱우걱 퍼먹고 싶었는데, 속이 너무 안좋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화장실에가서 한참동안 구토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나서야 어느정도 속이 진정되었다... 술을 마시고도 토하거나 평소에 위경련같은 게 있는게 아닌 내가 헛구역질이 나는 걸 보면 이게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인터넷을 좀 뒤적여보니 발리밸리의 증상과 일부 겹쳤고(잦은 설사, 구토, 오한, 고열, 위경련), 증상이 더 심해지면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단은 충분한 휴식과 수분섭취가 중요하다고 해서 숙소로 얼른 이동해서 쉬기로 했다. 워낙에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나서야 정신차렸다는 후기들이 많아 이여사가 많이 걱정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 일단 쉬고나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표정은 똥을 한바가지 씹었던 나...차를 타고 가는 내내 멀미까지 겹쳐 한숨도 못잤고,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차를 타고 이동해서 우붓까지 왔다.
그래도 숙소 상황이 여유가 있으면 얼리체크인을 해줄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간 우리. 체크인은 2시였는데, 1시쯤 도착했다. 우붓의 초입으로 들어갈 때 즈음에 이미 녹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감상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쯤을 달려서 도착한 우붓의 숙소인 코마네카 앳 비스마(Komaneka at Bisma). 스미냑과는 달리 정글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우붓에서 최상의 경험을 하기 위해 선택한 숙소인데,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큰 나무 때문에 이곳이 호텔이 맞나 잠깐 생각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호텔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택시에서 짐을 내려주며 우리를 로비로 안내했다. 우리나라의 5성급 호텔들과는 달리 회전문 없는 뻥 뚫린 로비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잉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분/예약 확인을 위해 여권을 확인하는 동안 로비의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따뜻한 손타올과 웰컴드링크를 내어다 주었다.
제발 얼리체크인이 되기를 기도했으나, 방 청소를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안내를 받았다. 소파에 앉아 시체처럼 앉아있다가 문득 전방을 응시하니 그림같은 정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비 중앙에 위치한 작은 분수 연못 너머로 팬스같은게 있었는데, 그 너머의 풍경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남편의 두고 한참을 곁에 있다가 궁금함이 더 앞섰는지 저 너머의 공간을 눈에 담기 위해 길을 떠난 이여사. 셀카봉에 핸드폰을 세팅하고 호기롭게 떠났는데, 막상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근데 누가보면 유튜버인줄 알겠네.. ㅎㅎ
이여사가 열심히 찍어온 영상에는 꽤 괜찮은 우붓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호텔은 정글의 절벽을 깎아낸 4~5층 높이 정도되는 건물이었고, 그 아래로 우붓의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파란빛의 바다가 하늘까지 비추고 있었는데, 이제는 초록빛으로 덮인 세상이라니.
나름 오늘 우붓에 간다해서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온 Greeny 코디. 오늘 이 옷을 입고 우붓 왕궁쪽도 돌고 쇼핑도 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태를 보니 숙소에서 하루종일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사진으로라도 남겼으니 되었다 .. ㅠ_ㅠ
로비와 가까운 4층에 위치한 우리 방은 컨디션은 정~말 좋았다. 길게 배치된 거실과 침실형태의 룸과 문으로 분리된 거대한 화장실, 그리고 바깥으로 곧장 연결되는 테라스가 있는 방이었다. 기절하기 직전이었지만 인상적인 룸 컨디션을 기억하고 싶어 영상으로 담아 저장해두었다.
발리에서는 수돗물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렇게 호텔에서도 양치를 위한 생수를 따로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호텔에서 제공을 해 주니 큰 문제가 없겠구나~ 싶어 생수로 양치를 해 보았는데, 생수로 입을 헹구고, 칫솔을 닦아내고 하는 과정이 너무 불편했다. 이여사는 물 걱정 안하고 실컷 낭비하면서 양치하고 싶다!를 여행 내내 달고 다녔다.
오 그래도 좀 감동이었던 호텔 직원들의 편지. 내가 하도 골골대고 있으니까 빨리 회복하라는 짧은 코멘트로 편지를 작성해주었다. Bapak Sunghoon이라고 해서 이사람들이 내 이름을 잘못 안건가? 싶었는데, Sir같은 일종의 호칭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모든 감동을 뒤로하고 드디어 마주한 침대. 2시에 체크인을 한 우리는 이렇게 4시간 정도를 기절해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여섯시. 해는 이미 안녕을 고했고, 숙소의 곳곳은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종일 뭐했나 생각해보니 빌빌대고 잠만 잤던거 밖에 없는게 정말 한심해 보였고, 아무것도 안 한 나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이여사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비싼 숙소에서 묵는건데, 숙소 구경이라도 하며 산책을 해야될 것 같았다.
아까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 호텔 로비도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텔 직원이 로비의 등을 밝히고 있었다. 이렇게 매뉴얼로 불을 밝히는 게 새삼 놀라웠지만, 옛날 옛적으로 돌아간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1층으로 내려오니 수영장이 있었다. 이미 저녁이 내려온 시간이라 수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무로 우거진 밀림 속에서 수영하는 기분은 꽤 괜찮을 것 같았다.
호텔 부지 내에는 우리가 묵는 스위트룸과 디럭스룸을 제외하고도 풀빌라 형태의 숙소들과 결혼을 위한 채플도 있다고 해서 도대체 얼마나 큰거지 싶었는데, 우리가 처음에 봤던 수영장 아래로 곡선형태의 다른 수영장이 또 하나가 있었다. 호텔 안에만 있으면서 산책해도 여러가지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좀 괜찮아질 것 같았던 몸이 다시 으슬으슬하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회복이 되었다면 진즉에 배가 고파야 했는데, 오늘 하루종일 안먹었음에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아직은 100% 회복이 안 된 것 같아 숙소에서 조금 더 쉬기로 했다... ㅠㅠ
한 두어시간을 푹~ 잤다. 자고 일어나니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는데, 동시에 트림도 무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트림이 나오고 식은땀이 난다는 건 소화가 되고 있고 열이 내리고 있다는 좋은 신호인 것 같아서 병원까지 갈 정도는 아니구나 생각하며 안도를 했다. 발리밸리에 제대로 걸리면 잦은 설사 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복통도 있어서 잠을 못 잘 정도라고 하는데, 다행히 그정도는 아닌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회복하고는 있어도 택시를 타고 바깥에 나갈 힘은 없어 룸서비스를 시키기로 했다. 어제 스미냑의 호텔에서 시킨 나시고랭이 약간 실패였어서 이번에는 미고랭을 주문하기로 했고, 나는 메뉴판에는 없는 흰 죽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근데 따로 돈을 안 받고 흰 죽을 제공해주겠다는 호텔의 서비스에 또 감동... 그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이렇게 서비스 형태로 흰 죽을 제공하는 것도 하루종일 아파서 정신없던 나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다행인 건 실패하면 어쩌지 했던 미고랭이 맛있어서 이여사도 만족했다는 것.... ㅎㅎ 여러모로 호텔에 고마운 것들이 많았던 하루다.
여태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타지에서 아파본 적이 없다~ 탈 난 적이 없다(인도빼고)라며 이여사에게 호기로운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누군가 아픈것을 가져다주기라도 한 것처럼 탈이 나고야 말았다. 이번 태교여행에서 내가 이여사의 보호자인 만큼 절대 아프면 안되겠다, 아니면 아파도 이여사 말고 내가 대신 아파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앓아누우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할 임산부에게서 케어를 받는 우스운 상황이 생겨버렸다. 가족이 생기면 아픈것도 미루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다던데... 딱 오늘이 그 날이었다. 내일은 조금만 더 힘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프지 말자. 나를 위해서, 이여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똘똘이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