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full로 틀어놓고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열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즈음 이런 증상이 보이곤 했는데, 어느덧 어제 온종일 나를 감싸고 있던 잔열은 다 빠져나가고 말쑥해진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근데 조금 이상했던 점은 배고픔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뭐든 잘 먹는 내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는 큰 문제가 있는 건데, 어제는 열이나고 아파서 그랬다쳐도 오늘은 열도 내렸는데 왜 이어는거지? 싶었다. 일어나서 잠깐을 돌아다녔더니 아직 어지러운 증상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입맛은 없었고, 바깥공기를 들이마셔도 답답한 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오늘은 오전부터 일정이 있었다.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예약한 액티비티라고 해도 무방한 쿠킹클래스. 어제 상태가 많이 안좋으면 취소를 하려고 하다가 하나밖에 없는 액티비티를 취소하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에 죽이되든 밥이되든 무조건 가기로 결정했다. 머리도 무겁고 몸도 축축 쳐지는 시작이었지만, 그래도 아침은 먹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식당으로 곧장 왔다.
조식은 종류가 꽤 있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브런치 형식의 팬케잌부터,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인 미고랭, 나시고랭, 소토아얌 등, 인당 2개의 메뉴를 선택할 수 있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팬케잌과 소토아얌, 그리고 와플과 미고랭을 주문했는데, 여전히 불편한 메스꺼움 때문에 한입씩만 떠먹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픈 상태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그래도 열은 내리고 어지러운 기운은 좀 가셨으니 기분좋게 출발할 수는 있었다. 8시가 되니 이미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 나온 기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투른 영어로 우리를 응대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인도네시아 축구 감독인 신태용(신따이용~) 감독을 얘기하면서 ice breaking을 하다보니 어느새 금방 첫번째 장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시장투어를 하는 일정이었는데, 내리자마자 노점 아주머니로부터 득한 자스민 향으로 기분좋게 시작했다. 우리가 향을 너무 마음에 들어하니 기사님이 돈을 내주셨음...
시장은 생각보다 볼품없었다. 잘 정리되지 않았고, 구획도 나누어져있지 않아서 이게 무슨 시장인가 싶었는데, 그래도 인도네시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향신료만큼은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강황이나 생각, 후추들도 있었고, 동남아에서 많이 쓰이는 코코넛류의 가루도 있었다. 오늘 요리하면서 이걸 다 쓴다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인도네시아의 음식 맛을 내는 대표적인 향신료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보는 즐거움은 있었다.
케투스 쿠킹클래스는 이미 한국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쿠킹클래스였다. 날짜가 근접할 때에 연락을 하면 풀부킹이라 예약을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예약을 진행했고, 다행히 원하는 날짜와 시간대에 예약할 수 있었다. 도착하고 허름한 시골집 대문같은 곳을 지나니 다양한 요리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행에 앞서 오늘은 어떤어떤 요리를 할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생각보다 우리가 요리해야 할 음식들이 굉장히 많았다. 다다르굴링, 미고랭, 사테구이 등등 인도네시아 음식의 A to Z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역시나 몸상태는 꽝이었지만, 그래도 열이 나는 것은 아니니 요리는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누가보면 쉐픈줄?)
다양한 재료들을 소개해 주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흑백요리사에서 최현석 쉐프가 팀전에서의 승리 요인을 '프렙(Prep; Preparation)'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재료들이 알맞게 계량되어 준비상태로 있었다. 단지 우리는 거들 뿐 ^^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듣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안내해주시는 오늘의 쉐프는 이곳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웬만한 재료들의 한글명칭을 알고 있었고, 꽤 많은 한국말을 구사하는 덕분에 오히려 재미가 있었다 (짤라짤라~, 많이많이 등등)
요리에 젬병인 우리 부부도 순서대로 컷팅하고, 으깨고, 가스레인지에 불 붙여서 데우고 볶고 하는 것들은 어렵지 않게 따라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재료들이 생소하진 않았는데, 팜슈가(Palm sugar)나 코코넛오일 등을 요리에 쓰는 것은 다소 생소했다. 그래서 분명하게 이 타이밍에 이 재료들을 넣으라는 설명이 있었음에도 '정말 여기에 지금 이거 넣는게 맞아?'라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몇 번 씩이나 했던 것 같다. 이 재료들을 넣음으로써 요리의 카테고리가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붐부발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도 안해본 절구질을 하는 나. 사실 저때도 상태가 좋지는 않아서 제정신이 아닌채로 절구질을 했다.
엊그제 와룽니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사테구이. 고기를 재워 둘 양념을 간단하게 만들고 꼬지에 꽂아서 구워둘 상태로만 만들어 주었다. 굽는건 다 도와주심 ㅎㅎ
준비하던 것이 하도 많아 뭘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 즈음, 팬에 코코넛 오일을 두르고 재료를 볶기 시작했다. 그래도 뭔가 그럴듯한 향이 나오기 시작하고 기분이 좋아졌던 우리. 우리가 한창 신나하니 사진을 찍어주셨다.
모든 요리가 다 완성되고 나니 생각보다 많은 양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프지 않고 배가 고픈 상태였다고 해도 둘이 먹기 힘들 양이었던 것 같은데, 이 많음 음식들을 만들어놓고 남길 생각을 하니 너무 아깝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맛있게 먹었던 거는 쿠킹바나나를 슈가팜에 조려 만든 디저트 정도? 나머지는 속이 안좋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ㅠㅠ 나 대신 이여사가 열일을 해주었던 날.
그래도 오늘 이 쿠킹클래스가 참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이, 우리 부부의 유일한 액티비티(?)이자, 뭔가 액션을 하면 결과가 있다는 점이 참 좋아서였던 것 같다. 보통 우리 부부는 특정 스팟을 계획하고, 다녀오고, 기념품을 사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오늘처럼 뭔가 결과물이 있다는 것에 큰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똘똘이에게 가장 좋은 태교가 되었기를 바라면서... ㅎㅎ
쿠킹클래스를 마치고 원하는 곳에 내려주겠다는 말에 우리는 우붓왕궁을 가기로 했다. 몸 상태가 더 나빠지면 우붓 왕궁과 시내투어는 포기하려고 했으나, 상태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 걸으며 바깥바람을 쐬고나면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예상했던대로 우붓의 햇살은 뜨거웠고,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붓 왕궁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볼만한 건 아니었다. 동남아 여행을 하며 흔하게 보았던 왕궁의 양식이었는데, 여러 블로그에서 시내를 가게된다면 꼭 들러야 하는 것처럼 말을 해놔서 굳이굳이 시간을 내 와봤다. 다른 왕궁들과는 다르게, 초록색으로 둘러싸인 것이 조금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 정도? 이여사는 한국에서는 없던 자신감이 갑자기 생겨서 배를 살짝 내어놓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발리에서만큼은 뭔가 좀 더 자유로운 느낌으로 있고 싶다나~ ㅎㅎ 결국은 저렇게 까놓고 있던 곳만 살이 타는 해프닝도 있었다.
왕궁을 슥~ 둘러보고 나가려는 찰나에 그래도 둘이서 사진을 남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왠 일본인 노부부가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나서 우리도 그 노부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제 쉬어갈 겸 커피나 한 잔 하러 갑시다~ 사냥낭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카페가 있다 해서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 날씨여서 조금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미리 찾아둔 발리스타 커피라는 카페인데, 발리에서 흔히볼 수 있는 녹색의 인테리어에 허름한 느낌의 카페였으나, 여기서 이 카페만의 특별한 포인트는 사향고양이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거였다. 일단, 이곳에 있는 사향고양이는 뚱땡이 돼지 고양이라서 우리를 마중나와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다.
루왁커피의 생산은 다른 커피와는 좀 다르게 특별하다. 사향고양이는 먹이로서 커피 열매를 섭취하는데, 뛰어난 후각으로 최상급 열매만을 골라먹을 뿐 아니라 이 고양이의 소화기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커피의 향미를 더해준다고 한다. 소화가 되면서 외피와 과육은 제거되고 커피 원두만 남게 되는데, 이 원두가 세척과 가공을 거쳐 루왁커피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향고양이가 루왁커피의 생산을 목적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으나, 이렇게 곤히 자고 있는 사향냥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불쌍하다는 생각이 싹 없어지고 오히려 멀리 여행와서 고양이 똥이나 먹는(?) 우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고양이는 고양이인지 우리가 온 건 절대 관심없고 우리가 갈 때 까지 잠만 드르렁 자는 사향냥...
내 몸상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커피를 마셔도 될까 잠깐 고민했지만, 한 잔 마시는 순간 피로가 싹 달아나면서 몸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거북했던 느낌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향도 잘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루왁커피는 캐러멜, 초콜릿, 풀냄새 등의 풍미에, 쓴 맛이 덜하고 신 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한 모금 들이켜보니 입 안에 신맛이 비중있게 맴돌았고, 살짝 나무? 풀? 비슷한 향이 났다. 워낙에 평소에 커피를 풀바디로 강하게 내려서 먹는 탓에 오늘 마시는 커피가 바디감이 있다고 느끼진 못했지만, 밸런스가 좋아서 편하게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요새 카페인을 절제하고 있는 이여사는 바닐라 라떼로 대신했다.
선물로 전달할 루왁커피도 알찌게 챙겨왔다. 80g이라 좀 적은감이 있었는데, 받는사람이 맛있게 마시며 아주아주 큰 행복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며 ^^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왕궁이랑 카페만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건 아쉬워서(어제 실컷 못놀았으니..) 우붓 워터팰리스를 가보기로 했다. 요새 이여사가 임신을 하고 나서 아이스크림을 유난히 많이 찾는데, 인도네시아는 코코넛으로 만든 음식들이 많고 맛있으니, 코코넛 아이스크림도 꽤 괜찮을 것이라 생각해서 굳이굳이 찾아왔다. 상호명이 투키스(Tukies)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들어가니 이미 만석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파인트정도 되는 크기에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었다. 둘이 먹기엔 양이 좀 많을까? 싶어서 한개만 시켰는데, 한 입 뜨자마자 두 개 시킬껄 하는 후회를 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는 진짜 코코넛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은 없는데, 저 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까 구경했던 우붓 왕궁을 지나 쭉 직진해서 오다보니 어느새 도착해버린 우붓 워터팰리스. 입구 바로 옆은 스타벅스가 붙어 있고, 스타벅스에서도 안쪽의 수상정원이 보였기에 굳이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사원이다보니 노출이 심한 복장이 제한되기 때문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사롱(Sarong)을 두르고 들어가야 했다.(이 찜통더위에)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니느라 체력을 야금야금 긁어다 쓰고 있었는데, 여기서 땀을 더 뺐으면 힘들었을 뻔 했다. 생각보다 너무 찜통이라 더 돌아다니기는 힘들 것 같아 얼른 그랩을 잡아 호텔로 들어갔다. 휴식이 좀 필요했다.
숙소에서 한참을 쉬다가 이대로 하루를 끝낸다면 아쉬울 것 같았다. 원래의 우리는 걷고 보고 먹고 마시는 일정으로 꽉꽉 채워서 돌아다니곤 했는데, 오늘의 일정은 쿠킹클래스를 제외하면 정말 뭐가 없었다. 그래서 원래 가기로 했다가 취소한 몽키포레스트의 근처로 산책 정도 다녀오기로 했다.
그랩으로 찍어보니 5분 정도 거리였는데, 하도 답답했던 우리는 그곳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구글맵으로는 도보로 가면 15분 정도 걸린다고 뜨길래 그냥 천천히 걸어가보자 했는데, 도로는 사람들이 걸어다닐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붓 왕궁 부근의 시내 정도되는 상태겠구나 싶었는데, 일단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없고 그마저도 울퉁불퉁하고 그마저도 온전치 못해서 걸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누군가 우붓의 도로 상태가 정말 험하다고 했는데, 차만 많아서 그런게 아니라 인도 자체가 없어서 그런거였다 ^^; 그냥 기분 환기좀 할 겸 걸어가자고 제안했는데, 이여사한테 정말 미안해지는 순간... ㅠㅠ
사실 몽키포레스트를 일정에서 뺀 것은 원숭이들의 공격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개별관리되지 않은 야생 원숭이들은 광견병을 보균하고 있어 물리거나 할퀴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여사의 가까운 지인이 근래 발리에 다녀왔다가 몽키포레스트에서 원숭이한테 물리고 난 후 꽤 고생을 했다해서(주사치료를 받는 등), 임신한 이여사를 데리고 몽키포레스트를 걸어다니면 안 될 것 같았다(그리고 원숭이들이 여성을 좀 더 만만하게 본다는 이야기가 있었음). 그래도 원숭이들 구경은 하고 싶어서 근처 입구까지만이래도 갖다와보자 하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가는 길에도 생각보다 꽤 많은 원숭이들이 도로변을 거닐거나 지붕 위를 오가고 있었다. 가는도중에는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 가족도 봤다. ㅎㅎ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계속 눈길이 갔던 것 같다.
원숭이들을 만나면 유의해야 하는 게, 눈을 마주치면 안된다고 한다. 눈을 마주치면 적대한다고 인식하여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해서, 멀리 보이는 원숭이들만 쳐다보고, 원숭이들이 가까이에 오면 눈을 땅바닥에 내리깔고 다녔다. 도대체 원숭이 보는게 뭐라고 이렇게 자존심 다 내던지고 땅바닥에 눈을 깔고 다녔는지... ㅋㅋ;;
몽키포레스트의 입구까지 도착한 우리는 한참을 아쉬워하다가 그랩을 잡아 숙소로 돌아갔다. 그래도 오늘은 우붓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숲이 주는 초록의 기운을 마음껏 흡수했고, 어제 숙소에만 있어서 아쉬웠던 부분을 해소할 수 있었다. 원숭이도 봤으니 괜찮아~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숙소로 돌아와서 좀 쉬고 숙소 내 산책로를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가족이 결혼식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근데 신랑측에 부모님으로 서 있는 노부부가 정말 익숙했는데, 오전에 우붓 왕궁에서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준 일본인 노부부였다. 여기서 이렇게 가족단위로 결혼식을 하는 것도 한국인 시선으로는 참 신선했는데(허례허식이 많은 한국 ^^;), 예복없이 여행하실때 복장 그대로 저렇게 사진을 찍으시는 것도 신기했다. 따지고보면 아들 결혼식 하는 날 오전에 우붓 시내 투어를 하셨다는 건데... 우리나라로 치면 내 결혼식 때 우리 부모님이 경복궁 둘러보신거랑 똑같은거네... ㅋㅋ;;
이후로도 이여사와 함께 숙소의 산책로를 힘껏 즐겼다. 호텔이 생각했던거 이상으로 규모가 엄청났는데, 거의 반나절을 걸어다니면서 산책하고 수영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때도 땀샘이 폭발하더니 식은땀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나를 괴롭히던 바이러스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인지 속도 계속 꾸륵꾸륵 거렸지만 몸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배고픔이 날 찾기 시작했다.
막힌혈이 뚫린것마냥 배고픔이 쓰나미처럼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장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식당에 갈 시간도 아까워서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몸을 좀 데워야 할 것 같아 단호박 수프와 함께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주문했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렇게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본 이여사는 그제서야 안도가 된다며 걱정되는 마음을 쓸어내렸다.
밥을 먹고 좀 쉬고있는데, 투닥투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화도 시킬 겸 호텔의 로비쪽으로 나왔는데, 생각보다 비오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 활엽수의 커다한 나뭇잎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정글 전체에 울려퍼지고, 빗방울 때문에 옅게 흩어지는 조명불빛도 좋았다. 발리에 오기 전부터 비오는 우붓이 너무 궁금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어제 오늘 고생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하늘이 선물을 주는 것 같았다.
어제와 오늘 앓아 누워있던 시간들을 잠깐 기억해봤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여행을 다녔어도 그 흔한 배탈 한 번 앓았던 적이 없는데, 이번에 참 많은 걸 느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함부로 나대지 말아야지~ 라는 1차원적인 반성보다는 내가 아프면 이제는 '우리 가족이 고생할 수도 있겠구나'를 느꼈다. 가족의 중심이되고, 계획을 리드하고, 임산부를 보호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빌빌대면서 아프면 안되었던 건데, 한 번의 실수(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생연어? 맥주?)로 인해 오히려 보호자가 뒤바뀌어 버린 게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 아마도 똘똘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이 책임감의 무게가 더 무거워질 것 같은데,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를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하구나를 느낀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온전히 회복 한 것 같으니, 찐따같이 지나간 일 때문에 찝찝해하지 말고 내일의 에너지 넘치는 나를 기대하며 우붓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자! 다시 시작해보자!!
근데 내일은 뭐하지?ㅋㅋ 아무 계획이 없는 우리의 여행은 계속 어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