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이 지난 2023년이 되어서야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맞추기 위해 외장하드를 뒤적이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새삼스럽고 어색하다. 대학생활을 함께하며 단기 연수를 목적으로 갔었던 상해였는데, 호주와 일본 이후로 나의 3번 째 해외여행(?) 이기도 했었기에 나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곳이다. 해외 단기연수 목적이기에 학교가 짜 놓은 스케쥴에 맞추어 이동하고 견문과 배움의 농도를 최대화 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이러한 목적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해외까지 가서 다양한 경험들을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다는 학생들의 피드백을 적극 수용했는지, 총 5일의 일정에서 3일이나 자유여행 일정으로 할애를 해 주었다. 우리가 구성했던 조는 학과 동아리 내에 남2/여2의 선후배로 이루어진 조였는데, 출발할 때 즈음에 아주 복잡한(?) 서로의 사정 때문에 출발 자체가 어그러질뻔한 상황이 있었으나, 다들 쿨했는지, 아니면 이런 경험을 놓칠 수 없어서 였는지 그대로 출발 하기로 했다.
7월 초에 출발하는 일정 탓에 날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의 더위와 습도는 한국에서도 힘들지만, 상해는 더더욱 그랬다. 상해 공항에 도착하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헉!하는 외침과 함께 날씨와의 힘든 사투는 시작됐다. 시작부터 표정이 좋지 않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식당으로 향해 점심식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날은 덥고 습도는 엄청났기에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부터 했다.
우리가 여행을 하러 감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제일 먼저 그 나라의 문화부터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차 문화가 굉장히 발달해 있기 때문에 매우 더운 날씨에도 우리나라처럼 냉장고에 바로 꺼낸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지 않는다. 미지근 혹은 굉장히 뜨거운 차로 속을 데우고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수기 같은 것들은 기대할 수 없었다. 때문에 더위를 못이기는 우리를 위해서 찬 음료 정도를 시켜서 더위를 달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단 메뉴 선택은 자유롭지 않았다.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 했고, 제일 처음 나온 것이 저 산처럼 쌓여있는 밥이었다. 앞접시에 덜어서 먹으라는 의도로 이해를 했으나, 찰기는 없고 퍽퍽한 느낌이 주는 '맛없음'에서부터 밥맛이 떨어졌다... ㅎㅎ 더욱이 정말 기가 막혔던 것은 오른편에 있던 나물이었다. 진짜 까놀라유를 한 통은 부었던 것인지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나물무침은 태어나서 처음봤다. 중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들이 '중국음식은 기름기가 많다' 였는데, 세상에!!
뒤이어 나온 마파두부와 양배추 볶음 역시 기름둥둥의 향연이었다. 향 또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어서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더운 날씨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우리는 여행 초장부터 지쳐버렸다. 바깥의 새로운 풍경 보기를 좋아하는 나도 그냥 시원한 곳에 앉아서 찬물이나 들이켜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식사 장소에서 몇 시간을 달려와 도착한 수로마을. 그래도 아마 이곳이 내가 생각했던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닐까 한다. 이곳은 '수로마을'이라는 이름답게 습도가 대단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습했던 습도 덕분에 이마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고, 다들 이러한 날씨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서로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정말 지나칠 정도의 더위와 습도는 여행의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게 했고, 젊음의 패기와 여행자의 욕심을 순식간에 잠재워 버렸다.
사공이 가장 앞에서 노를 젓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을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나름 그늘진 배천장 아래서 가만히 수로마을을 즐기는 재미는 나쁘지 않았다. 배가 수로마을을 한바퀴 쭉 돌며 정해진 종점까지 가는 동안 뱃머리로 들어오는 약한 바람 덕분에 그래도 나름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유있게 오후를 즐기고 있던 오리들
여기저기 널린 빨래들이 마을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꾸미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무채색 마을에 싱그러움을 더했던 초록초록이들
군데군데 자연스럽게 자리했던 다리들도 다 똑같은 모양이 아니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뱃머리 사공의 노질은 너무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아서 적당히 둥실거리는 것이 멀미도 없고 좋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줄줄이, 끊임없이 지나가는데, 운하는 어찌나 길던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저 관광을 위한 마을이겠거니 지레짐작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속옷이나 옷가지들이 걸려있는 것이 드문드문 보였고,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도 보였다. 설명하는 사람 말로는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과 수로를 따라 붉은 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어스름지는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어찌나 아쉽던지. 욕심일지도 모르는 이런 기대들 덕분에 꽤 즐거웠던 것 같다. 1일차 버프도 좀 있었고 ㅎㅎ
운하를 돌고 수로마을을 조금만 더 둘러보자 했었던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골목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툭툭 치며 통증을 덜어보는 게 전부였긴 했는데, 뭔가 성에 차지 않아서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더운 날씨때문에 더 피곤해졌다....
수로마을 이후로 항저우의 세계 3대 가무쇼인 송성가무쇼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더워서 이미 뭘 보고 자시고 할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날씨가 좀 너무했던 하루였다...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송성 가무쇼의 이름은 '송성천고정'이라고 한다. 항주의 역사와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문명의 탄생과 전쟁, 사랑, 그리고 항주의 용정차와 비단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무쇼이다. 미국 라스베가스쇼, 프랑스 물랑루즈와 함께 세계 3대 쇼 중 하나인 송성가무쇼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무대라고 하는데, 이 당시에는 '세계 3대 가무쇼를 보러 갈껍니다~~~'라는 코멘트는 무시한 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어둡고 서늘한 곳에 가는 것 자체가 좋았다... ㅎㅎ
1막은 이런 부귀영화의 상징인 황금빛 무대로 시작한다. '송공연무'라 하여 송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하연이 열리고, 세계 각국에서 사절단이 방문하고 서방에서 사절단이 오는 등 아시아권과 유라시아권역의 가무가 함께 펼쳐진다. 처음부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엄청난 규모의 무대가 펼쳐지는데, 마치 눈뽕을 맞은거마냥 살짝 멍~해졌다.
2막은 금나라의 침략과 송나라를 지키기 위한 악비의 전투장면이라고 하며, 큰 대포소리와 함께 무대의 여기저기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말들이(진짜 히히힝 말) 무대를 가로지르며 실제 전투 장면을 방불케 한다. 실제 전쟁을 하는 거마냥 박진감이 넘치고 볼거리가 대단하다.
3막은 아름다운 서호를 배경으로 백사와 허선의 사랑이야기를 주 이야기로 한다.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다리의 한 가운데에서 남자 배우와 여자배우가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무대 위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ㅋㅋㅋ (스케일이 미쳤다) 앞자리에 앉으면 실제로 물이 엄청 튄다고 한다. 투명한 물방울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불빛은 마치 다른세계에 있는 것 같았고, 수 백 명의 주인공들이 출연하는 뮤지컬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작은 몸짓에 감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4막은 항주의 특산물 용정차에 대한 차 문화를 소개하며 막을 내린다.
뭐 당연히 중국어로 진행되는 무대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겠으나, 과연 그 어느나라가 이것을 재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3천여 명의 사람들 때문인지 무대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고, 이게 뭔가 중국의 저력인가 싶었다. 그리고... '항주에는 미인(美人)이 많습니다.'라는 가이드의 말을 농담조로 흘려들었는데, 가무쇼에 나오는 배우들은 미모가 상당했다. 내가 송성가무쇼를 그토록 칭찬하고,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다... ㅎㅎ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일정을 뒤로하고 다 같이 함께했던 저녁식사. 그래도 점심식사에 비해서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고, 다양한 음식들이 있어 선택지가 많았었다. 뭐 10년이 지난 지금 식당이 어디였는지 전혀 생각은 안나지만, 이 날 유난히 맥주가 맛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우리는 정말 정신이 없었는지, 숙소에서 씻지도 않은 채 에어컨만 켜고 잠이들고 말았다. 결코 쉽지 않았다. 남은 날들도 오늘과 같아 고된 날씨에 허덕이며 태양을 가려줄 그늘만을 찾아다닐 것 같았다. 과연 어떨까. 내 인생 최고의 야경을 기대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