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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독서

데미안(Demian, 1919)

트루비옹 2016. 12. 28. 10:37

 


 

 

스스로를 깨우는 책

Hermann Hesse, 1919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다. 헤르만 헤세가 독일계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화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은 '헤세와 그림들'이라는 전시회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알았고, 시인으로서 활동했다는 것은 오늘 이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알게된 사실이다. 사진 하나만으로 그를 판단한다는 건 굉장히 주제넘는 일이지만, 유난히 반짝이는 그의 두 눈동자가 작가, 아니 예술가로서 그의 인생을 모두 말해주는 듯 하다. 구글링을 통해서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흑백사진들 뿐이었지만, 생기있고 에너지 넘치는 그의 통찰력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헤르만 헤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돈의 시대를 탐구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자기 실현의 길을 걸었다. 지식계급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한 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身病) 등 가정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정신분석 연구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 작풍을 달리했다. 이런 작풍을 타고 쓰여진 명작 중의 하나가 <데미안>이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당시에 <데미안>집필을 시작하여 전쟁이 마무리 된 후에 책을 출판했다고 한다. 또한 작품성 하나만으로 평가받고자 이미 저명한 작가의 이름을 보류하고 <데미안>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늦게서야 찾게 된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명작이라는 것은 작가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온 브랜드 상품이 아니라 순수하게 작품성 하나만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증명한 셈이다.

 

 

한 때,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것을 참지 못하여 여행이라는 수단으로 해소하려 했었지만 유토피아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만 느꼈지,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좀처럼 정리할 수 없어 툭하면 밤을 지새웠고, 불안하기만 한 내 모습을 보며 공포감이 들곤했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정의를 외치며 고담시를 심판했던 하비 덴트가 사고에 의해서 자신의 얼굴과 인생의 반 쪽을 잃고 자신의 모든 사상을 운에 맡겨버린 것처럼, 나는 취업이라는 요소를 운에 기대기 시작했고 나의 역량과 스스로의 가치를 기억속 저 너머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통찰력은 <데미안>을 통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첫째로, '책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앞서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되어 자신의 유명세를 감추고 오직 작품성으로만 승부하려 했던 것만 보아도(나중에는 독일의 문학상인 폰타네 상의 수상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스스로가 작품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독일어를 이해하여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오는 작문의 힘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역자의 해석도 뛰어나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학창시절 '중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도서 100선'에 늘 포함되어 있던 책이 <데미안>이었는데, 졸립다, 책이 어렵다 등의 이유로 읽기를 미루어 온 것을 후회할 정도이다(아예 펼쳐보지도 않았기에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몰랐다.). 덕분에 그동안 쭉~ 미루어 왔던 변명거리를 해소할 수 있었다.

둘째로, 불안하기만 하던 내게 '나를 찾는다'는 가치 중심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수 많은 글귀들 중 유난히 와 닿았던 문구가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먼저, 이 책의 실재(實在)하는 등장인물은 '에밀 싱클레어' 단 한 명이다. 그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세계라 여기던 하녀들과 불량한 친구 크로머, 멀기만 했던 연인 베아트리체, 그를 돕던 조력자 피스토리우스, 심지어 신적인 존재라 여기던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까지. 그저 단순한 조연들로만 인식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들의 존재가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의 상흔을 입고 누워있는 에밀 싱클레어는 아주 희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데미안의 존재를 의식했다는 구절을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결국, 이말인즉슨, '데미안'은 단순한 사람이 아닌 에밀 싱클레어 '자신'이었다. 헤세는 싱클레어의 영적인 내면을 외부로 꺼내어 데미안이라는 존재로 마주하게 하고 '알을 깨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영혼의 목표를 싱클레어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라는 신적인 존재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여 좇으라는 인도를 해준다. 결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자아를 찾는 과정을 천천히 이끌어 간 것이다.

 

 

 

'세상의 굴레'로 인식되어지는 온유하고, 정겹고, 평화로운 아버지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서 반쪽짜리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체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그 전체의 세계는 '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형상화되어지고 '알'이라는 규범적 세계를 깨고 나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감고 있던 한쪽 눈을 뜨게 해주며, 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자신의 많은 것들을 살필 수 있게 해준다.

 

 

 

'데미안을 왜 이제야 만났지?'라는 질문이 어리석다는 걸 알았다. 사랑도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고, 책 또한 시기적절할 때 만나야 명작이 된다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 느끼는 온전한 마음의 온도를 중학생 때 느꼈다면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나대로 충분한 감명을 받았기에 굉장히 만족스럽다. 과거와 현재의 이런 생각들로 미루어 볼 때, 후에 <데미안>을 여러 번 더 읽는 나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즐겁다. 나는 언제나 불안하고, 데미안을 마주하고 있는 에밀 싱클레어이고, 인생이라는 책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싱클레어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헤르만 헤세의 선물인 것 같다. 잠시 책을 덮었지만, 데미안은 필요한 순간에 특정한 대상을 빌려 내 앞에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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