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호주에 한 달 간의 홈스테이 이후에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독도 분쟁, 애니메이션 강국, 튼튼하고 기능이 다양한 전자제품, 온천, 사무라이 등등.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이지만, 세계 초 강대국이자 선진국인 일본. 당시 전자공학을 전공하던 나에게 있어 일본의 방문은 가장 큰 기회이자 해외여행에 눈을 뜨게 된 역사적인 계기였다. 공부하는 목적과 비전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여행에 눈을 뜨게 된 가장 확실한 계기가 되었지 ...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나는 한창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학술연수의 존재자체도 모르고 있다가, 선배 한 명의 부재로 대신해서 참석하게 되었다. 얼떨결에 조인을 한지라, 내가 가장 막내인 것도 모른채 말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도쿄시내쪽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다보는 일본의 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정했다. 일찍 나와서 상점을 여는 사람들도 있고, 무척이나 천천히 늦은 출근을 하는 사람이며,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를 산책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반대차선 ...
빡빡했던 첫날 일정 탓에 점심 식사 이후 곧장 일본의 애니메이션 학교로 향했다.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 나도 만화를 좋아해서 연재할때마다 보는 게 몇 개 있는데, 그런 애니메이션들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이기에 건물 내부가 거대하고 화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기도 오산이었다. 낡은 80년대 구식 건물을 보는 듯 했다. 이런 곳에서 정말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최고의 애니메이션들이 나오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 하나로 똘똘 뭉친 인재들만 있었던 것 같다. 뭐 한국의 학생들이 방문을 한다니까 뭔가 형식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도 있었겠지만, 형식화된 것 하나 없이 배우려는 열정 하나만으로 노력하는 것들이 눈에 보였다. 열정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도착했을 당시 파랗고 맑았던 하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새까만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이내 쏟아내기 시작했다. 종일 일정을 버스로 이동하는 우리였기에 비는 맞지 않았는데, 일본은 원래 이렇게 소나기가 많이 오는건가? 싶었다 ㅎㅎ;; 무사히 다음 장소인 NHK 방송국에 도착했다.
내가 이번 도쿄 학술연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체험이 있다면, 바로 이 아나운서 체험이 아닐까 한다. 저기서 뭐하고 있냐고 궁금해 하겠지만, 내가 단순히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내던져졌다. 내가 어디출신이며, 이름이 뭐냐고 물은 뒤 뭔가를 주더라. 그냥 프롬프터를 보고 멘트를 칠 수는 있었겠지만, 나름 대본을 주며 구색을 갖춰주었다. 앞에 청중들이 한 30명 정도는 앉아있었던 것 같다. 저렇게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래도 나름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대본을 써주시긴 했는데, 눈에 하나도 안들어온다.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고, 한국어도 읽을 줄 모르는 팔푼이가 된 것 같았다.
자! 아나운서를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라는 진행자의 멘트로 시작하더니 방송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NHK방송국 9시 뉴스의 여성훈입니다. 라고 말하는중... ㅎㅎ
이렇게 인사했었던 첫마디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직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었던 짜릿하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아침일찍 출발했던 탓인지, 아니면 아나운서체험하느라 기가 빨린것인지 버스에 타자마자 기절을 한다.
여행의 처음과 끝은 날씨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첫 해외여행에서 깨달았다. 우리가 다음 일정이었던 아사쿠사 관음사에 도착하니 구름이 말끔하게 걷히기 시작했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나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단아하고, 웅장한 영락없는 일본식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통 TV에서 다루어지는 일본식 건물들은 단아하고, 기품있는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일본 사람들의 형식화하는 재주는 여기도 비껴가지 않은 듯 싶다. 형식과 법칙들이 지루하고 고루할지는 몰라도, 긴 안목으로 본다면 견고하고 단단한 그들만의 것이 된다는 것이되는 힘을 갖게 하는 것 같다.
거리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니 수많은 종류의 잡화상점들이 보였다.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 사무라이 칼, 고양이 인형 등 일본을 대표할만한 수많은 것들이 보였다. 외국에 갔으니 외국것들이 좋아보일 수도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생각해보면 한국을 대표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잠깐 생각해보게 했다.
이제 여행의 마무리를 장식할 야경 보러 가기. 말할 필요도 없이 도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도쿄타워에 갈 수 있는,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도쿄타워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손에 꼽을 정도로 멋있었던 것 같다.
도쿄타워에서 바라보는 도쿄야경의 매력은 뭐라고 해야할까. 야경이 정말 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설레는 느낌을 가져다 준다.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수많은 야경들을 봐왔지만 (부다페스트, 싱가포르, 콸라룸푸르, 상해, 오사카, 하코다테 등) 이렇게 가까이에서 건물들이 떠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야경은 없었던 것 같다.
손잡고 찍은거 x 어깨 맞댄거 x 무릎에 앉은거 x 다정한거 x 게이 x
빡빡한 일정에 치여 피곤했해서 숙소에 도착하고 지친몸을 침대에 누여 잠깐 휴식을 취했으나, 일본에서의 1분 1초가 매우 소중했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던 우리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처음 구입했던 일본맥주! 당시에는 편의점도 흔한 것이 아니고 수입맥주가 그렇게 들어오던 시절도 아니어서 처음 맛보는 일본 맥주에 또 설렘... ㅋㅋ당시에는 맥주에 대한 조예(?)가 얕았던 지라 무작정 형들이 추천해주는 맥주를 사서 마셨다. (아사히/기린) 맥주의 시원한 목넘김에 한껏 감동했고, 피곤했던 여정, 탈 많았던 기억들이 알싸하니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정말 길었지만 짧게만 느껴졌던 하루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평소에 큰 기대를 가질수록 실망도 크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 왔지만, 이번만큼은 기대한 보람이 있었음을 실감케 했다. 물론 나에게 있어 첫 해외여행이라는 점이 정말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신기했던 것도 있었다. 내일 일정을 한껏 기대하며 도쿄에서의 첫 날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