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기 어제 도반(Dobhan, Dovan)의 숙소에 도착한 이후로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했다. 숙소의 침대 한 켠에 누워 한참을 그대로 누워있다가 밖을 나와보니 구름이 잔뜩 껴 있었는데, 숙소의 주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고산의 공기에 익숙해져 나름대로 빗소리가 주는 여유로운 리듬도 감상할 수 있었고 정상을 정복해 냈기에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다. 다만 이때부터 무릎이 좀쑤시긴 했지만 이 날은 버틸만 했다. 하룻밤 자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숙소 앞에 있었던 수국은 아침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3,000m가 넘어가면서 메말라버린 산의 모습에 조금은 실망했었는데, 산중의 온도가 조금씩 미지근해지고 마침내 꽃을 볼 수 있는 숙소에 왔던..
드디어 그곳에 닿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순간을 지금 말하려 한다. 고등학교 시절 한라산 등반에 실패한 이후로 수 년 동안 계획했던 안나푸르나 트래킹의 가장 절정이었던 순간은 바로 오늘이었다. 아직 밟아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땅을 머릿속에 그리며 가슴이 뛰고, 사진속의 장면들을 미래의 청사진으로 삼아 끊임없이 달려왔다. 내가 그 곳에 닿았을 때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이 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생각하니 머리의 뒤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전율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 당시에는 '보인다'였던 것들이 '보았다'로 바뀌면서 기억의 뒤편으로 밀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아직은 그 생생한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너무 많이 잤나?" 그래, 너무 많이 잤다. 어제 오..
신선들의 놀이터에 들어서다 시누와(Sinuwa)의 아침은 좀 쌀쌀했다. 와이파이와 전기 사용료가 별도인 것을 밤새도록 투덜대다가 새벽 5시 쯤에 눈을 떴다. 늘 그랬듯이 아침에는 팬 케이크 두 장과 레몬생강차로 하루를 시작했다. 트래킹을 하는 내내 꿀을 발라 먹는 팬 케이크와 레몬생강차에 유난히 집착했는데 입맛에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아침형 인간이 아닌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는 늘 늦게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는데 아침에 마시는 차(茶)의 따뜻함을 잘 몰랐다.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를 할 적에 브루스가 아침마다 홍차를 데워주곤 했는데 그 때부터 아침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 같다. 특히 오늘같이 쌀쌀한 날씨, 그리고 겨울에 마시는 아침 차 한 잔이 제일인 것 같다. 다이닝 ..
설산은 아침에 보아야 제 맛 꿈속에서 신라면을 먹다가 잠이 깨버렸다. 어제 저녁 라면을 먹을까 하다가 꾹 참았는데, 꿈에 나온 거다. 오늘만큼은 눈 덮힌 산을 보며 라면을 꼭 먹겠다고 아침부터 다짐했다. 가장 이른 아침에 일어난 나는 팬케익과 레몬생강차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유난히 한국사람을 좋아한다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던 주인장 누나(?). 어제 나를 호객했던 사람인데 생각보다 호의적이고 친절해서 편했다. 영어는 서툴렀지만 음식이 맛있어서 오랫동안 있고 싶었던 곳이다. 누군가 설산은 아침에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참이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중을 나갔다. 태양이 서서히 빛을 더하고 산 꼭대기가 반짝이면서 아래를 밝게 비추었다. 안나푸르나 트래킹..
트래킹 1일 차 어젯밤 해리가 소개시켜 준 렌탈샵에서 침낭을 빌렸다. 없는 거 빼고 다 빌릴 수 있었는데, 애초에 트래킹을 위한 여행을 계획했기에 옷이나 신발 등등은 챙겨왔다. 침낭을 빌리는 건 처음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여행을 할 적에도 침낭을 대신 했던 건 내 옷가지들이었는데 산 위에서의 추위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빌리기로 했다. 보온의 정도에 따라 침낭의 가격이 달랐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했던 나이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는 두려웠는지 제법 두껍고 튼튼한 침낭을 빌렸다. 아침 일찍부터 레몬생강차를 대접받았다. 차 한잔에 감동받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해리와 해리의 아내는 먼저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해리에게 부탁한 입산허가서와 TIM..
포카라 걷기(자전거도!) 벌써 지친건가. 어제까지 부어있던 다리가 가라 앉지 않고 통증이 계속되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걸으면서 포카라가 어떤 곳인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었는데 좀 걱정이 되었다. 포카라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자리 잡을까 두렵기도 했고 당장 내일부터 트래킹인데 몸을 풀어두지 않으면 다리가 고장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급한대로 혼자서 다리를 주물럭 거리며 마사지를 하고 아침 일찍부터 레몬생강차를 챙겨 마시고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숙소에서 쉬었다. 아, 포카라 첫날 묵었던 숙소는 와이파이가 화가 날 정도로 터지지 않아 무척 답답했는데 그 때문에 초입보다 안쪽에 있는 숙소로 옮겼다. 무심코 찾아서 들어간 숙소였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숙소중 하나인 '아보카도'였다. 여긴 한..
드디어 포카라로 인터넷에서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며 버스 티켓을 끊는 창구를 찾아냈다. 버스의 등급에 따라(이를테면 일반과 우등의 구분처럼 더 안락하거나 와이파이가 되는 것 등등) 가격이 달랐는데, 나는 가장 저렴한 500NRP짜리 버스를 선택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인도에서 경험했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7시간이라는 장거리 구간을 단돈 500루피에 해결하다보니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먼지의 도시(?) 카트만두에서 벗어나 드디어 포카라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여행자들의 천국, 그리고 배낭여행자의 3대 블랙홀 중 하나인 포카라로 간다. 준비할 틈도 없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게 정말 여섯시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불교의 향기를 느끼다 유럽에서의 여행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봐야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팔 여행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긴 일정에 적게 보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꽤 어려웠다. 여전히 '여행은 바빠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새벽에는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눈을 뜨고 분주한 사람들의 틈에 섞여 돌아다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스스로와의 계획과 다짐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느린 아침을 먹고 억지로 게으름을 피웠다. 나와는 안 어울리고 성에 차지 않았지만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다. 어제는 파슈파티나트만 봤고, 오늘은 보다나트만 볼 생각이다. 매일 아침 먹는 건 잊지 않았다. 사실, 아침 먹는 게 가장 중요했다. ..